“불편/불쾌함을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사과문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이런 문구는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잘못을 축소한다. 불쾌함을 끼쳐서가 아니라, 옳지 않기 때문에 사과하고 개선해야 한다. 나쁜 것을 보고 불쾌해질 순 있지만, 불쾌하지 않다고 해서 차별적인 내용이 옳은 것이 될 순 없다. 마찬가지로 불쾌하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다. 기분은 단순한 입장 차이로도, 명확한 원인 없이도, 혼자서도 얼마든지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 불편러’라고 비웃으며 정치적 감각을 ‘개인의 예민한 성질’로 폄하하는 공격처럼, 최근 모든 것을 기분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Kibun’은 ‘기분’에서 파생한 인터넷 신조어다. 기분이 개인의 감정 그 자체라면, Kibun은 주관성이 강화되어 감정이 절대화한 개념 혹은 그런 상황을 희화화한 표현이다. 옳지 않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 Kibun을 나쁘게 했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식이다. SNS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기분을 근거로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는(‘계정 운영을 중단하라’ ‘특정 인물과 친하게 지내지 마라’ ‘내가 싫어하는 그림을 그리지 마라’ 등) 일이 벌어지고, 할인카드를 쓰는 남성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한 여성 배우는 매장된다.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지적받으면 지적한 사람의 태도나 말투가 폭력적이라며 화를 내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의견을 폐기한다. 이런 사연들만 모아도 세헤라자데 열두명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에서 이 ‘호모 센티멘탈리스’라는 단어를 차용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자본주의와 사적 감정 사이의 상호 침투가 이루어지고, 개인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의 자본으로 활용하도록 요구받는다. 감정 자아 또는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노동주체로서 감정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는 동시에 자신과 타인의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적 계급을 결정한다. 한때 EQ(Emotional Quotient, 감성 지수 또는 감정적 지능지수)가 주목받으며 열풍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감정을 중립적이고 이성적으로(‘짐승’ 같아서는 안 된다) 표출하는 한편 주관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해석한다. 내가 느낀 감정은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에 나의 판단만이 유효하고, 타인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는 ~한 기분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대통령도 사실 관계를 해명해야 하는 공적 자리에서 ‘자괴감’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명실상부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시대, 아니 Kibun 지상주의의 사회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분 지상주의에는 권력이 개입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힘을 가진 자의 기분이며, 약자의 생존과 같은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경찰은 시민에게 물대포를 직사하여 살해하지만 시민들은 경찰의 수고를 염려하여 차벽에 쉽게 뗐다 붙일 수 있는 스티커를 제작한다. 여성 대상 범죄를 근절하자고 말할 때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고 불쾌해한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벌이는 장면이 보기 싫다고 눈살을 찌푸린다. 아동은, 청소년은, 이주노동자는, 성소수자는, 비만인구는…. 호모 센티멘탈리스들에게 자신의 기분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때도 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기민하게 숙지해야 한다. 기분보다 우선시 해야 할 것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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