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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라운

입력
2016.12.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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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2.2

무장투쟁을 통해 노예제 폐지를 이루고자 했던 존 브라운.
무장투쟁을 통해 노예제 폐지를 이루고자 했던 존 브라운.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1846~48)을 벌여 텍사스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고, 동부의 시민들이 ‘노다지’를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무렵(골드러시, 1848~55), 남부의 주들은 노예들의 저항과 북부 자유주들의 압박으로부터 ‘노예주’의 주권을 방어하기 위해 민병대 정비 등 방위태세를 갖추느라 분주했다.

북부는 산업혁명과 중공업화로 노동자 부족사태에 직면해 있었고, 남부는 여전히 노예노동에 기반한 면화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북부는 유럽 공산품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율 관세 등 보호무역이 필요했고, 남부는 면화 수출을 위한 자유무역과 관세 철폐가 관건이었다. 1850년 탈주노예법은 연방이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면서 남부 노예주에 안긴 선물이었다. 1808년 노예수입이 금지된 뒤로도 밀무역은 여전했지만 남부 정치인과 지주들 입장에서 노예 확보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코네티컷 주 출신 백인 존 브라운(John Brown, 1800~1859)은 오직 무력으로만 남부의 노예제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 맹렬한 노예 폐지론자였다. 그는 1859년 10월 16일, 단 22명의 타격대(흑인 5명 포함)를 이끌고 버지니아 주 하퍼스페리(Harpers Ferry)의 연방 병기고를 점령했다. 머스킷과 라이플 등 10만여 정의 무기를 탈취해 노예들을 무장시킴으로써 남부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노예 존치주의자들과 맞서고자 했다.

타격대는 하지만 지역 민병대와 연방 로버트 리(Robert E. Lee) 대령 휘하의 군인들에게 포위돼 전투 중 브라운의 두 아들을 포함 10명이 숨졌다. 부상 당한 채 포로로 잡힌 브라운은 살인과 반란 공모, 반역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연방 정부의 승인 하에 12월 2일 교수 당했다. 그는 “나 존 브라운은 이 죄 많은 땅의 범죄행위는 피가 아니고는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점을 단연코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최후진술했다.

그는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영웅이라는 평, 극단적 모험주의자라는 평. 하지만 그의 판단이 현실적이었음은 그를 “미치광이”라 불렀던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 1년여 뒤의 남북전쟁(1861~65)에 의해 입증됐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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