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아내가 위독해 한시가 급하다. 나는 관용 헬기를 출동시킬 권한이 있는 공무원이다. 어떻게 할까?
고교시절 꽤 유명한 얘기였던지, 실제 헬기를 띄운 아버지를 둔 녀석은 동창모임에서 친구들의 추임새에 맞춰 당시를 재생했다. “멋진 아버지”(친구들) “어머니는 지금 건강”(녀석) 등 흐뭇한 대화가 오가는데, 눈치 없이 이렇게 묻고 말았다.
“사정은 딱하지만 불법 아닌가.” 의사, 정치인, MBA출신 경영컨설턴트, 대기업 중간간부로 방귀깨나 뀌는 고교 동창들은 한결같이 “어디서 기자질이냐”고 나무랐다. 매정한 놈으로 제대로 찍힌 뒤, “난 절대 안 그런다”고 애꿎은 아내한테 화풀이했다. 아내는 “옳지 않으니 바라지 않는다”고 답한 걸로 기억한다.
저 고약한 질문이 시시때때로 괴롭힌다. 사사롭지만 생명을 다투는 일인데 원칙만 따질 수 있나. 아내를 아들로, 헬기를 또 다른 권한(예컨대 대입 입대 입사 등)으로 바꾼대도 맹약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인간관계와 자질구레한 사정까지 집어넣으면 숱하게 변주되는 물음들의 홍수에 젖지 않을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권한의 정당한 도리 따위 흐릿해진 지 오래지만 작금의 국정농락 사태는 다시 그 권한이란 것(지위 돈 지식 힘 등)의 정도(正道)를 아리게 묻는다. 국정농락 일당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생명체가 아니다. 오욕의 역사와 이 사회의, 우리 안의 일그러진 욕망들이 오랜 세월 덕지덕지 들러붙어 탄생한 괴물이다.
최순실 모녀와 일가는 배금주의(“돈도 능력이야”)와 사교육지상주의(“정당하게 입학”)의 도회(屠膾)다. 아버지가 남긴 정체불명의 돈을 땅 투기로 불리고, 급기야 최고 권력자를 조종해 공무원을 수족처럼 부리면서 기업들을 갈취해 또 돈을 벌었다. 공직자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국정을 가욋일(“신경 쓰느라 머리가 아프다”)로 치부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딸의 성공을 위해 달렸고, 공교육은 협박과 촌지로 짓눌렀다. 누군가가 피해를 봤건만 “그게 왜 부정입학이냐”고 항변한다.
우병우(“박근혜와 김기춘을 존경한다”)와 안종범(“모두 대통령의 지시를 따랐다”)은 권력을 쫓는 이 시대 엘리트들의 ‘혼이 비정상’인 순응주의와 성적만능을 상징한다. 소년급제와 해외유학 등 이 땅의 부모들이 대개 소망하는 공부 잘하는 삶이 이토록 추잡해질 수 있다. 째려보고 팔짱 끼고 “모른다”는 우병우의 요령부득보다 그의 아버지가 교사라는 사실이 더 참담하다.
김기춘은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악몽이다. 독재의 기초를 닦고, 무고한 청년들을 간첩으로 몰아 삶을 짓밟고, 지역갈등 망령으로 나라를 찢어놓은 죄악만으로도 진작 단죄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교활한 정치공작 적폐로 공명정대해야 할 법치를 희롱하고 있다.
저들의 만행은 사실 우리라는 무대에서 자랐다. 교수 대학총장 고위관료 국회의원 법조인 재벌 등 주연 뺨치는 수많은 조연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일들로 극의 완성도를 더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위장전입을 하고, 돈이 많으니 불법 고액과외를 하고, 여기저기 선이 닿으니 부정입학도 시도하는 부자 부모들과 가난한 추종자들 그리고 출세하려면 부당한 지시라도 마땅히 따르는 공무원과 직장인들은 엑스트라로 동원됐다.
한낱 단역에 불과한 우리 안의 욕망도 언제든 그들의 탐욕처럼 악성종양으로 자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의 수단으로 돌멩이 대신 촛불을 쥔다. 그들만의 어두운 성채를 밝히는 한편 우리 내면의 그늘을 지우기 위해. 10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달리 우리에겐 1,000만 촛불이 있다.
몇 년 전 수료한 아버지학교는 진정한 아버지의 첫 덕목으로 아버지와의 결별을 꼽았다. 그이의 인간적인 면모는 존중하되 세태에 찌든 잘못된 습관, 그릇된 가치관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버리는 역설은 우리의 다른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어렵다면 다시 보라. 박정희의 등을 보고 자란 그 딸의 오늘을.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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