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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원한 ‘김과장’, 헬조선의 판타지

입력
2017.02.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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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김과장' 공식 포스터. KBS 제공
드라마 '김과장' 공식 포스터. KBS 제공

분명하다. 지금 사람들이 TV에서 가장 보고 싶어하는 건 ‘잘 빠진 판타지’다. 이미 ‘도깨비(tvN)’가 증명했고, 도깨비 없는 허전함을 뭘로 달래나 했던 바로 그 걱정을 ‘김과장(KBS)’이 메워주고 있는 느낌이다.

‘김과장’은 현실인 척하는 판타지다. 경영진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경영 위기를 직원들이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는 속 터지는 이야기나 회사 조직 내 치열한 사내 정치 등의 스토리는 딱 현실이다.

하지만 좌충우돌 하면서 못된 놈들 혼내 주는 김성룡 과장(남궁민)의 코믹하면서 속시원한 활약상은 판타지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 해도 좋다.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웃을 준비가 됐다. 왜냐하면 요즘 같은 때 바로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크게 웃고 싶었으니까.

2014년 ‘미생(tvN)’은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회사원들은 숨이 막혀서 안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김과장’은 다르다. 돈키호테 처럼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는 김성룡 과장의 모습은 시원한 사이다 벌컥벌컥 마시는 기분이다.

사실 김성룡 과장만 판타지 스러운 건 아니다. 그토록 현실적인 ‘미생’에서도 판타지에 가까운 ‘과장님’이 한 명 나왔다. 후배 직원을 내 몸처럼 챙기는 정의로운 상사, 오상식 과장이다.

왜 하필 모든 직장 드라마의 판타지는 과장에서 출발할까.

어느 조직에서나 ‘과장’은 굉장히 중요한 자리다. 후배들을 챙기면서 상사 비위도 맞춰야 하는 중간관리자다. 여기에 실무에서는 막내들이 못 하는 경험과 숙련된 기술이 있고, 상사들에게 없는 기동력과 패기가 있다. 사실상 부서의 기둥 같은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조직 생활에서의 어떤 기로에 놓인 게 과장이다. 드라마 안에서나, 현실에서나 왜 이리 우리나라의 모든 조직은 이렇게 문제투성이인지. 실력 보다 누구에게 줄을 설 것인지 사내정치를 잘 하는 게 더 중요하고, 아랫사람 챙길 시간에 윗사람에게 살랑거리는 게 몇 배 더 중요하다.

윗사람, 혹은 그보다 더 위의 경영진이 슬그머니 자기들 주머니 채우는 걸 보고도 눈 감고 귀 막는 법을 배워야 하고, 중간관리자의 나이 즈음이면 으레 생기는 배우자와 자식 등 가족들을 위해 돈 불릴 궁리를 처절하게 해야 하는 시기다. 마음으로는 ‘명분’과 ‘정의’, 그리고 ‘초심’과 ‘열정’ 같은 단어가 더 가까운데, 실제 몸은 자신이 지금까지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존 선배들, 특히나 성공한 선배들에게 더 가까워지고 있는 자리가 바로 과장이다.

드라마 속 남궁민이 위풍당당한 태도로 이사와 사장에게 큰 소리 뻥뻥 치는 모습을 보면 카타르시스가 펑펑 터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드라마 속에서 실장님과 사랑에 빠지는 캔디형 여주인공 이야기가 그저 막연한 꿈이라면, 실력과 배짱을 다 갖춘 김성룡 과장의 ‘진상짓(회장 아들에게 ‘개념을 주차장에 놓고 왔냐’고 큰 소리 치거나, 빙탕5000 박스를 갖고 가버리거나 하는)’은 내가 회사에서 너무나 하고 싶은 바로 그것, 때로는 구체적으로 머리에 그려 보기도 했던 진짜 꿈이기 때문이다.

‘김과장’의 판타지가 수목극 경쟁작인 또 다른 판타지 ‘사임당, 빛의 일기’를 넘어선 시청률과 화제를 몰고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KBS2 수목극 ‘김과장’에서 속 시원한 ‘사이다’화법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은 배우 남궁민. KBS 제공
KBS2 수목극 ‘김과장’에서 속 시원한 ‘사이다’화법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은 배우 남궁민. KBS 제공

또 한 가지. 요즘 같은 세상에 ‘김과장’은 드라마의 현실적인 설정 그 자체가 판타지이기도 하다.

김성룡 과장이 경력직으로 채용돼 근무하는 TQ그룹은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고 있는 큰 기업으로 설정돼 있다. 사옥은 서울 강남 한복판 대형 빌딩이다. 경리부는 경영진에게 뭔가 밉보여서 지하에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어쨌거나 직원들이 근무 중에 잠시 담소를 나누거나 커피 한 잔 마실 때면 탁 트인 통유리 뒤로 빌딩숲이 보인다. 화장실과 빌딩 곳곳의 청결을 책임지는 청소부도 있고,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김성룡 과장은 얇은 코트 하나만 입고 출근하는 걸 보니 사무실도 제법 따뜻한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처럼 작은 사무실에서 벌벌 떨면서 일 하고 사무실 청소도 스스로 해야 하는 군소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로서 김과장의 근무 환경이 정말 부럽다. 판타지 스러울 정도로. 내 처지가 이래서 인지는 몰라도, 과연 대한민국에서 대기업 직원의 이야기가 ‘평균적인 샐러리맨의 애환’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죽도록 공부를 하고도, 기성세대 보다 더 뛰어난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이 안 되는 20대 젊은이들. 그들에게는 김성룡 과장의 좌충우돌 홍길동 같은 활약기는 멀고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저 아주 단순히,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출근하는 ‘김과장’ 속 TQ그룹 정규직 직원들의 모습 자체가 판타지가 아닐까.

마더티렉스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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