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 이동권 공론화 16년
KTXㆍ비행기 편의시설 좋지만
목적지까지 환승ㆍ접근성 불편
저상 고속ㆍ시외버스 도입 절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의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매표소. 고향 가는 사람들과 부대에 복귀하는 군인, 출장 가는 회사원 등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티켓을 사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전동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이원교(51)씨에게 고속버스 탑승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씨가 창원행 버스표를 요청하자, 매표소 직원은 “표는 살 수 있지만, 전동 휠체어를 탄 채 버스에 타거나 휠체어를 짐칸에 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또 다른 터미널 직원은 “전동식이 아닌, 접이식 수동 휠체어라면 휠체어는 짐칸에 싣고 장애인은 터미널 직원 등이 들고 안아서 좌석까지 옮겨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운행 중 휴게소에 들를 때는 직원이 없어 내리고 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변한 건 하나도 없네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인 이씨의 한탄이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공론화 한지 무려 16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 버스 회사 “정부 지원 필수”
고속버스 대당 1억5000만원~2억원
저상버스 구입ㆍ개조 비용 더 들고
휠체어공간 비워둬야 하는 문제도
3년 전 악몽이 된 ‘장애인의 날’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었다. 이씨를 비롯해 장애인 300여명이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였다. 당시 장애인 단체 회원들은 “우리도 버스를 타고 고향을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미리 사둔 버스표를 들고 버스 탑승을 시도했다. 경찰은 이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싶다는 장애인들에게 최루액을 쏴서 진압했던 광경은 처참할 정도였다. 이씨는 오른쪽 눈에 최루액을 맞았다. 그는 “오른쪽 눈에만 시력 감퇴와 백내장이 왔다”며 진압 후유증을 의심하고 있다.
현행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는 ‘교통사업자와 교통행정기관은 이동 및 교통수단 등을 접근ㆍ이용함에 있어서 장애인을 제한ㆍ배제ㆍ분리ㆍ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고속ㆍ시외버스를 탈 수 없다. 매년 명절과 장애인의 날이 되면 장애인 단체들이 전국 각지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리도 고향에 가고 싶다”며 시위를 벌이는 이유다. 문애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국장은 “올 추석(10월4일) 즈음에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장애인 이동권 관련 행사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 국가인권위원회ㆍ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
장애인 부부의 희생에서 시작된 이동권 투쟁
2001년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해 한 명은 숨지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이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탈 수는 없는가.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뜨거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고 1주년인 2002년 1월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는 헌법 소원이 헌법재판소에 제기됐다. 저상버스는 버스 출입구에 계단이 없는, 바닥이 낮은 버스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유모차를 끄는 부모 등이 비교적 편하게 타고 내릴 수 있다.
헌재는 2002년 12월 각하 결정을 했다. 국가의 사회보장ㆍ사회복지 증진의무를 규정한 헌법 제34조는 국가의 일반적인 의무를 뜻하는 것이지, 장애인을 위해 저상버스를 도입해야 한다는 구체적 내용이 헌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두루뭉술한 헌법 조항만으로 국가에 저상버스 도입 의무를 지우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구체적인 법’을 만들기 위해 장애인 단체들은 끈질기게 버스ㆍ지하철 점거 투쟁에 나섰고, 2005년 국회에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교통약자법)이 통과됐다. 장애인을 비롯해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어린이 등 교통약자들이 차별 없이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2007년에는 장애인의 교통수단 이용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도 제정됐다. 이에 따라 국토교통부는 5년마다 한번씩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을 수립해 발표한다. 정부 계획에는 못 미치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시내버스(3만3,887대)의 약 19%인 6,447대가 저상버스이다. 운임 일부를 정부가 부담하는 장애인콜택시도 전국에 2,820대가 보급됐다.
# 정부 “기술ㆍ안전 문제 해결부터”
2019년 9월까지 80억원 투입
버스ㆍ운용기술 개발 등 연구 시작
상용화까지 얼마 걸릴지 미지수
고속버스 대신 KTX나 비행기 타라고요?
그러나 아직도 휠체어 장애인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버스가 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일부 시내버스(광역급행형, 직행좌석형, 좌석형), 마을버스 등이다. 장애인 단체들은 특히 고속ㆍ시외버스의 저상버스 도입 또는 휠체어 승강장치 장착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이원교씨는 “ ‘장애인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KTX나 항공편을 이용하면 되지, 왜 굳이 고속ㆍ시외버스를 타려고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현실을 잘 모르는 말”이라고 말했다. 버스터미널보다 드문 KTX 기차역이나 공항에 내리면 거기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방은 수도권보다 저상 시내버스나 장애인 콜택시 대수가 턱없이 부족해 환승이 어렵다”고 말했다.
버스 회사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는 문제다.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 관계자는 “고속ㆍ시외버스는 한 대당 가격이 1억5,000만~2억원으로 시내버스(1억2,000만원)보다 더 비싸 저상버스 구입이나 개조의 비용도 더 든다”면서 “또한 휠체어 승객이 없을 때는 그 자리에 다른 승객이 앉을 수 있는 접이식 의자를 두는 시내버스와 달리, 고속ㆍ시외버스는 장시간 탑승하는 승객을 접이식 의자에 앉힐 수가 없어서 휠체어 공간은 장애인 승객이 있건 없건 비워둬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정부 지원과 규제는 필수다. 시내버스는 일반 버스를 저상버스로 교체하는 데 필요한 돈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50대 50 비율(서울은 60%)로 댄다. 일반 버스는 한 대당 가격이 1억2,000만원이고, 저상버스는 2억2,000만원인데 버스 사업자가 기존의 일반 버스를 저상버스로 바꾸면 차액 1억원을 정부와 지자체가 각각 5,000만원씩 나눠 대는 방식이다.
그러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는 저상버스 확대 계획을 우선 순위에서 미루고 50% 비용도 대지 않은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12년 ‘2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 당시 국토부가 밝힌 2016년의 저상버스 목표 대수는 9,594대였으나, 실제 저상버스 보급 대수는 3,621대(달성률 37.7%)로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친다.
국토부, 올해에야 연구용역 착수
정부가 고속ㆍ시외버스 문제에 꿈쩍 않자 장애인단체들은 2014년 정부와 지자체, 버스회사를 상대로 저상버스나 휠체어 승강장비를 도입하라며 차별구제 소송을 냈다. 2015년 1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은 “교통약자법은 모든 유형의 버스에 동일한 시기ㆍ비율로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내용을 계획에 포함시킬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이라고 해석하기 어렵다”며 “당시의 기술적ㆍ재정적인 조건을 전제로 점진적인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정부에 면책을 줬다. 이 소송은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와 달리,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22일 “시외버스와 시내버스 일부에 휠체어 사용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장애인이 사전 예약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 “국토부가 관련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고, 장애인 편의 시설을 설치하는 교통사업자에 대한 재정ㆍ금융ㆍ세제 지원을 확대하라”고 국토부와 기획재정부에 각각 권고했다. 그러나 인권위 권고는 강제력이 없다.
정부는 이제야 연구해 보겠다고 나선 상태다. 국토부 교통안전복지과 관계자는 “평균 시속이 30~50㎞에 불과한 시내버스와 달리, 고속ㆍ시외버스는 100㎞안팎의 속도로 장거리를 달리기 때문에 저상버스 도입 등에 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교통사고 안전 문제도 훨씬 꼼꼼히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올해 3월부터 연구비 80억원을 들여 교통안전공단, 한국교통연구원 등 13개 기관과 함께 휠체어 탑승 고속ㆍ시외버스과 관련해 ▦버스 개발 ▦안전성 검증 ▦운영기술 개발 ▦실용화 기반 구축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예정된 연구 완료 시기는 오는 2019년 9월이지만 이연구가 끝나는 시점일 뿐이고, 상용화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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