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연락해주세요.” 몇 해 전 날아든 한 독자의 이메일은 무척 다급해 보였다. 전화기 너머 “제보할 게 있어요”라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마치 “살려주세요” 같았다. 30분 남짓, 그는 수년 간 남편에게 당해온 폭력 피해를 털어놨다. “말할 곳도 없고, 무서워요.” 조카뻘인 기자에게 그는 울먹였다. 그의 사연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건 “정말 힘드셨겠어요”라는 무력한 공감과, “여성단체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전화번호 몇 개를 일러주는 것 정도였다. “정말 죄송하지만,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양해의 말도 함께였다. 그런데 그는 “알고 있다”며 “그래도 들어줘서 감사하다”고 연거푸 인사를 했다.
그보다 앞서 성매매의 덫에서 탈출한 10대 소녀 생존자들을 인터뷰 할 때다. 이들을 보호하는 쉼터에 요청을 했는데 소녀 다섯 명이 집단으로 응했다. 소녀들은 때론 담담하게, 때론 울컥하며 말했다. 사연은 달랐지만, 결국 부모와 공동체의 책임이었다. 이들을 성매매의 늪으로 내몰고 짓밟은 건 어른들이란 생각에 인터뷰 내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힘겨운 인터뷰를 마치고 쉼터 실무자에게 “많은 소녀들이 나와 놀랐다”고 얘기하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이것도 치료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성매매 여성들이 시달리는 가장 심각한 심리적 피해는 죄책감이에요. 그런데 언론이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구나’라는 걸 인식하는 거지요. 피해 사실을 자신이 스스로 말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 하는 효과도 있고요.”
이 두 경험은 기자의 ‘공적 역할’을 깊이 깨닫게 한 중요한 계기였다. 얼마 전 정혜신 박사의 글을 보며 새삼스레 이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최근 페이스북에 쓴 ‘사람을 살리는 공감’에 관한 얘기다. 스스로 ‘정신과전문의’보다 ‘치유자’라고 불리길 원하는 그는 “내 고통을 ‘공감하고 있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라고 했다. “참혹함 속에서도 그 ‘한 사람’을 만난 사람은 한 사람을 통해 세상과 사람 전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이는 언론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는 얘기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강자에 가려진 절반의 진실을 밝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는 게 기자의 임무라고 나는 믿는다. 민간기업인데도 언론을 ‘공기(公器)’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일 테다.
그런데 그런 공적 업무를 수행하다 어이 없이 집단 폭행을 당하고도, 자국민에게서 발길질보다 더한 뭇매를 맞고 있다. 대통령의 방중 행보를 비판하는 기사는 ‘감정적 비난’으로 매도됐다. “방중 성과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언론을 보느니, 청와대 페이스북을 팔로우하자”는 주장이 SNS에 넘쳐난다. 기자가 ‘바이라인’(기사를 쓴 기자 이름을 밝힌 줄)을 걸고 쓴 기사보다, ‘대통령의 방중 행사에 참여했던 기업의 대표’라고 밝힌 익명의 인터넷 커뮤니티 글을 사실이자 진실로 믿는다. 젊은 기자들 입에서도 “기자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흘러나온다.
상처 받은 언론은 사회를 치유할 힘도 잃는다. 기자의 공적인 공감의 역할에 힘을 부여하는 건 권력도 자본도 아닌 독자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조리돌림이 아니다. 댓글로 ‘기레기’ 욕을 백만 줄 달아본들, 기분만 상하지 논조에 아무 영향을 못 미친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표를 지낸 시인 노혜경씨의 말이 더 아픈 일갈로 들리는 이유다.
진실에 더 다가서는 팩트를 찾아보겠다고 쓰레기통을 뒤지면서도 ‘쓰레기’ 소리를 들을 줄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기자 정신의 반대말은 맨 정신’이라는 우스갯말을 하면서도 자부심을 잃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별 수 없이 '기레기'가 되고 보니 드는 서글픈 세밑 단상이다.
김지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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