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데헤아’ 불리던 2인자
신 들린 선방으로 ‘맨오브더매치’
이젠 ‘대한민국의 데헤아’ 등극
한국 골키퍼 첫 유럽 무대 기대감
“보이밴드 멤버처럼 생긴 전설”
외국팬들 시선 사로잡아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
한국 축구는 과거 고전했던 월드컵에서 ‘보석 수문장’을 발견하곤 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독일과 마지막 경기. 주전 수문장 최인영은 뭐에 홀린 듯 전반에 실수를 저지르며 3골을 헌납했다. 김호 감독은 후반 시작과 함께 골키퍼를 신예 이운재로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이운재는 후반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8년 후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영웅이 됐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는 등 수모를 겪었지만 골키퍼 김병지를 보며 위안을 삼았다. 이후 김병지는 이운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국 축구의 수문장 계보를 이어갔다.
이번 러시아월드컵이 나은 최대 수확은 골키퍼 조현우(27ㆍ대구)다. 그는 27일 독일과 F조 마지막 경기에서 7개의 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신들린 선방을 선보이며 2-0 승리를 이끌어 ‘맨오브더매치(MOM)’에 뽑혔다. 조현우는 27일 현재 월드컵 세이브 부문에서 13개로 기예르모 오초아(33ㆍ멕시코ㆍ17개), 카스퍼 슈마이켈(32ㆍ덴마크ㆍ14개)에 이어 당당히 3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 팬들은 손흥민과 박지성, 김연아, 류현진, 이세돌, 팀 킴(여자 컬링) 등 한국이 낳은 슈퍼스타들과 조현우가 어깨를 나란히 한 사진을 만들었다. 한 외국 팬은 조현우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빗대 “보이 밴드 멤버처럼 생긴 한국 골키퍼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월드컵에서 어느 팀이 우승하든 그에게 MVP를 줘야 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미국 여자 축구계의 레전드 골키퍼인 호프 솔로는 조현우가 독일 레온 고레츠카(23ㆍ샬케04)의 완벽한 헤딩 슈팅을 걷어내는 사진을 올리며 “내가 왜 축구를 사랑하는지 다시 일깨워줬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사실 러시아월드컵 전만 해도 조현우는 ‘무명’에 가까웠다. 소속 팀 대구나 K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기막힌 선방 솜씨, 호리호리한 체격, 순한 외모가 스페인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 다비드 데 헤아(28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닮아 ‘대헤아(대구의 데 헤아)’라 불렸지만 ‘전국구’ 스타는 아니었다. 그는 청소년 대표 시절에도 또래인 노동건(27ㆍ수원삼성)에게 밀려 늘 ‘2인자’ 신세였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김승규(28ㆍ빗셀고베)가 당연히 주전으로 여겨졌지만 신 감독은 A매치 경험이 6경기에 불과한 조현우를 스웨덴전부터 내세워 ’대박‘을 쳤다.
그는 신정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를 했다. 함상헌 신정초 감독은 각 반을 돌아다니며 골키퍼 자원을 찾다가 조현우를 봤다. 약간 마른 체형에 키가 큰 편이길래 일단 운동장으로 데려왔다. 함 감독이 직접 중앙선에서 길게 볼을 찼는데 크게 한 번 바운드된 볼을 조현우가 훌쩍 점프해 받았다. 깜짝 놀란 함 감독이 “축구 배웠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함 감독은 “알고 보니 아버지가 체조 선수 출신이었다. 그 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선문대 감독 시절 조현우를 가르쳤던 조긍연 전북 현대 테크니컬 디렉터는 “순발력, 유연성을 모두 갖췄다. 바르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국가대표에서도 곧 대성할 거라 봤는데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니 흐뭇하다”고 웃었다. 조현우는 대학 시절 오른발을 다쳐 몇 달 간 왼발로만 공을 찬 덕에 지금은 양 발을 다 잘 쓰게 됐다. 그의 최대 장점이기도 하다. 조현우가 한국 최초로 골키퍼의 유럽 무대 진출 꿈을 이룰 수 있을지 관심이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조긍연 디렉터는 “유럽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조현우는 아내의 얼굴 사진을 팔에 새겨 넣는 등 평소 아내와 딸 사랑이 각별하다. 독일전을 마치고도 그는 “정말 힘들었을 아내에게 고맙고, 저를 응원해주신 대구시민, 대한민국 국민께 정말 감사하다”며 “독일이 세계 1위지만, 주눅 들지 말고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하자고 선수들끼리 얘기하며 각오를 다졌다”고 밝혔다.
카잔(러시아)=윤태석 기자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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