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체트 독재에 가족 4명 납치
끝내 이유, 생사 못 알아냈지만
실종-구금자 가족연대 이끌어
국제적 지지 끌어내
‘강제 실종 Forced Disappearance’은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 연행ㆍ납치-구금됐지만 정보의 은폐ㆍ통제로 소재도 생사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저 말 뒤엔 고문-살해-암매장 같은 더 끔찍한 과정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1960, 70년대 라틴아메리카 우익 군사정권의 국가폭력을 계기로 널리 쓰이게 됐다.
‘강제 실종’이 남미에 국한된 범죄는 아니다. 나치가 유대인과 정치범을 그렇게 ‘관리’했고, 한국의 과거 군사정권이 저 수법으로 대학과 시민사회를 억눌렀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폐쇄적 국가의 인권현실을 설명할 때도 강제 실종은 늘 언급되며, 미국(관타나모)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60년대 아이티와 과테말라 군사정권이 시동을 건 남미의 강제 실종은 해를 거듭하고 이웃 국가로 전수되며 점차 악랄해졌다. 그 결정판이 미국을 등에 업은 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 우익군사정권의 국가폭력이었고, 국가 공조 ‘콘도르 작전’이었다. 그들은 연행ㆍ납치 사실부터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실종’이었다. 기소된 게 아니니 재판도 없고, 구속적부심(Amparo, Habeas Corpus)도 무의미했다. 고문 끝에 숨지거나 처형 당해도, 피해자 가족은 시신 확인은커녕 숨진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산티아고의 악명 높은 ‘빌라 그리말디Villa Grimaldi’를 비롯, 고문실을 갖춘 비밀구금시설 17곳을 운영했다. 피노체트 집권 17년 동안 연행ㆍ고문 당하거나 살해ㆍ실종된 이는 4만 18명(2011년 집계). 강제실종 희생자 중 90년 민주화 이후 유골 발굴과 DNA대조를 통해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아직도 1,000여 명이 ‘실종’상태다.
강제실종은 공포(terror)를 전염시킨다. 누구나 언제든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 끌려간 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기댈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공포. 그 공포를 통해 개인ㆍ사회의 저항 의지를 마비시킨다.(desaparecidos.org)
칠레의 ‘실종-구금자 가족연대(AFDD, 이하 AFDD)는 저 야비한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조직적 집단적으로 저항한 사실상 첫 대중조직이다. AFDD는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1977~)보다 2년 앞선 1975년 출범했다. 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의 국가정보기관 ‘디나(DINA)’와 군, 경찰은 아옌데 정부의 관료와 정치인, 공산당원 및 관련 단체 회원, 반정부 성향 인사들을 무차별 납치ㆍ연행했고, 그들 다수가 초기에 실종됐다. 75년은 ‘죽음의 카라반 Caravan of Death’이란 납치ㆍ처형 전문부대가 헬기까지 몰고 다니며 설치던 때였다.
아옌데의 조카인 작가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의 말처럼 “(당시) 모든 학생, 언론인, 지식인, 예술인, 노동자 사이의 분위기는 굉장히 침울”했고, “대다수는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를 원했고, 저자세를 유지하며 조용히 살고자”했다. “고문실, 강제수용소, 암살, 급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거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빠져나갔다거나 전화가 도청된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그게 소문이 아니라 모두 진실임을 드러낸 게 AFDD의 원년 멤버들이었다. 대부분 여성이던 그들은 범죄자들조차 숨죽여 지냈다는 그 ‘청정 침묵’의 공포 시대에 국가폭력의 총구 앞에 나서 내 남편, 내 아이들이 어디 있고, 왜 데려갔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야겠다며, 정의와 진실을 외쳤다. 그리고 그 대열의 선봉에 아나 곤잘레스(Ana Gonzalez)가 있었다.
아나는 76년 4월 29일 저녁 두 아들(루이스 당시 29세, 마누엘 22세)과 며느리(낼비아 알바라도 20세)를 잃었다. 며느리와 함께 끌려간 2살 손자(루이스-낼비아의 아들)는 그날 밤 마을 어귀에서 버려진 채 발견돼 이웃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했다. 훗날 목격자 증언으로 알려진 바, 정보기관원들이 인쇄소에서 퇴근하던 두 아들을 연행해갔고, 남편을 마중 나간 낼비아를 따로 끌고 갔다. 임신 3개월이라며 호소하던 낼비아는 기관총 개머리판에 복부를 맞아 기절한 채 짐짝처럼 차에 실렸다고 한다.(memoriaviva.com)
다음 날 아나의 남편 마누엘 세군도 레카바렌 로자스(Manuel Segundo Recabarren Rojas, 당시 50세)도, 아들 며느리의 행방을 수소문하러 나섰다가 납치ㆍ실종됐다. 남편과 두 아들, 며느리는 모두 공산당원이었고, 칠레 인쇄노조 간부 출신인 남편은 아옌데 정부의 산미구엘(San Miguel)지구 ‘식량-가격 관리위원회’ 의장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아나는 남은 네 남매와 손자를 돌보며 그 길로 AFDD에 가담, 저 싸움을 시작했다.
AFDD가 ‘오월광장 어머니회’보다 먼저 출범한 것은 칠레 쿠데타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이른바 ‘더러운 전쟁(76~83년)’보다 앞섰기 때문이지만,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가 국가폭력을 묵인ㆍ방조한 것과 달리, 칠레 교회는 온건하게나마 자유와 평화를 옹호하며 인권운동의 숨통을 열어준 덕도 있었다. 쿠데타 직후 가톨릭 칠레교구는 ‘칠레 평화를 위한 협력위원회’를 출범시켰고, 교회 인권기구인 ‘교구 연대(vicaria de la Solidaridad)’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정권 탄압으로 75년 말 해체됐지만, ‘연대’는 군사정권 말기까지 구금자 법률 구제 및 실종자 가족 생계 지원 등 많은 활동을 했다. AFDD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실종자 가족들이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클로타리오 블레스트(Clotario Blest, 1899~1900)를 중심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FADD 원년 회원 10여 명은 서슬 퍼런 정보기관과 군 부대, 경찰관서를 다니며 실종자 소재와 생사를 따졌고, 가족 사진을 목에 걸거나 가슴에 달고 시위와 집회를 이어갔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현 ECLAC)의 산티아고 본부 앞 단식 농성, 칠레 의회 앞 연좌농성, 미국과 유럽, 바티칸 교황청, 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기구, 주요 대학 연설 등 그들은 칠레의 인권 현실을 고발하고, ‘강압 실종’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다 했다. 피노체트 치하의 첫 단식농성을 비롯한 저 모든 투쟁의 맨 앞줄에 아나가 있었다.
아나 곤잘레스는 1925년 7월 26일 칠레 북단 토코필라(Tocopill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6남매를 둔 과부 어머니가 철도 노동자 아버지와 재혼해 낳은 두 아이 중 한 명이 아나였다. 그는 11살에 산티아고로 이사해 삼촌 내외의 집에 얹혀 살았다. 30~40년대는 스페인내전과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기세등등하던 때였다. 아나는 삼촌이 읽던 칠레공산당 기관지 ‘El Siglo(48년 폐간)’를 읽으며 프랑코 독재와 레지스탕스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NYT) 16세때 청년공산당 모임에 가입했고, 거기서 만난 마누엘과 44년 결혼해 6남매를 낳았다. 남편은 철도-인쇄노동자로 일하다 1970년 아옌데 정부의 지역 식량가격위원회 의장에 선출돼 일했다. 당시 전국위원회 의장이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알베르토 바첼레트(바첼레트 전 대통령의 아버지)였다. 남편이 납치되던 날, 그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집에 남은 덕에 무사했다. 훗날 그는 “둘 다 나갔거나, 함께 집에 있었다면 나도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아메리카지부장 호세 미구엘 비반코(Jose Miguel Vivanco)는 “아나는 늘 선두에서 엄청난(tremendous) 용기를 보여주곤 했다. 그의 용기가 없었다면 실종자는 더 늘어났을 테고, 국민적 관심도 잦아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나를 ‘증오가 없는 호소력의 한 상징’이라고 했다. “아나는 자기 일과 칠레의 인권 현실을 말하면서도 늘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런 어조로 독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이들, 심지어 지지하는 이들에게도 진실을 전하곤 했다.”(nyt, 2010.1.22) 또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낙관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는 “그들은 여성이, 법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주부들이 정치 슬로건을 들고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리에 나설 때면 그는 늘 단단한 꽁지머리에 빨간 매니큐어를 발랐다. 활동하기 편한 풍성한 옷차림에 마푸체(Mapuche)풍의 장신구도 갖췄다. 겁먹지 않고 주저앉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일종의 ‘무장’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얘기지만 그런 그를 칠레 시민들은 스페인 공산당 출신 내전 영웅 돌로레스 이바루리(Isadora Ibarruri, 1895~1989)에 견줘 ‘칠레의 라 파쇼나리아(la Pasionaria, 시계꽃)’라 부르곤 했다. 아나는 그 애칭도 좋아했지만, ‘미지타 리카(mihita rica, Pretty girl)’라 불리는 걸 더 좋아했다.(elpais.com)
피노체트는 91년 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했고, 2003년 귀국해 300여 건의 국가 범죄로 기소됐으나 단 한 차례 재판도 받지 않고 2006년 91세로 사망했다. 89년 대선에서 야당연합을 이끌며 승리한 파트리시오 아일윈(1918~2016) 이래 정권이 바뀌어온 동안 90년의 ‘진실과 화해 국가위원회’부터 92년의 ‘보상 화해위원회’, 2009년의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예닐곱 개의 위원회와 포럼 등이 꾸려져 진상 조사 및 보상절차가 진행됐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전사 출신 바첼레트의 두 차례 임기에도 강제실종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우선은 군부의 완강한 침묵 탓이었지만, 이른바 ‘국민 화합’과 진실-정의의 저울질 탓이기도 했다.
아나는 2004년 1월, 당시 칠레 군사령관이던 후안 에밀리오 체이레(Juan Emilio Cheyre, 1947~)에게 공개 편지를 썼다. ”당신은 정치적 보복을 염려하지만, 나는 가족을 잃은 상실의 아픔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철저히 무기력한 상황에서 겪었을 일들을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진실은 당신 손 안에 있고, 그 진실을 공개한다고 군의 명예가 더 망가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 길만이 당신의 군대가 나의 군대,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2010년 칠레 정부가 유골 DNA분석으로 유족을 찾기 위해 DNA 샘플 제공 캠페인을 전개하며 아나를 방송 모델로 기용했다. 참담한 사연과 투쟁의 이력, 후덕한 미소와 담담한 말투의 그는 뜻밖에 대중 스타 같은 인기를 누렸다. 함께 사진을 찍자는 이들, 서명을 해달라는 이들도 많았다. 그는 늘 잔잔한 미소로 흔쾌히 응하곤 했다. 망명 정치인의 딸인 칠레 출신 가수 아나 티주(Ana Tijoux)는 지난해 2월 아나의 자택을 찾아가 병석의 그를 노래로 위로했고, 청년들은 산티아고 중심가에 그의 얼굴 벽화를 그렸다. 그림 옆에는 “아름다운 삶에 건배를…”로 시작하는 짧은 문구가 담겼다.(elpais) 그의 집은 자신의 활동사진과 각종 배너들, 아옌데, 빅토르 하라, 사진 등으로 칠레 현대사 박물관을 방불케 했고, 한 켠에는 그가 영국 가수겸 사회활동가 스팅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나는 “우리가 피노체트를 물리쳤다지만, 내 생각에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나뉘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말 대선에서 우파 전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당선됐고, 피노체트를 공개 지지하며 출세한 안드레스 채드윅(Andres Chadwick)과 헤르난 라레인(Hernan Larrain)을 각각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보수 우경화했다.
그는 기나긴 싸움과 기다림의 생애를 일기처럼 기록했다. 거기 한 구절,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상상 속에서 당신은 늘 내 앞에, 내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어요. 당신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나도 따라 손을 뻗지요. 그러곤 이렇게 말해요. ‘내 늙은 사랑 어떻게 우리 이렇게 늙었을까요!’ 그러다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와선 벽에 걸린 당신의 사진을 바라본답니다. 나 혼자 늙어버렸어요!”(elpais)
쿠데타 45주년이던 지난 9월 그는 ‘El Pais’ 인터뷰에서 우체부가 “아니타, 언젠가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게요”라 적은 메모를 건넨 일화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이란, 아마도 모든 걸 내려놓고 울 수 있게 해줄 소식일 테지만, 그는 한 달여를 더 기다리곤 지난 10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76년 4월의 그날, 혼자 살아 돌아온 2살의 푼티토는 이제 44세의 루이스(Luis Recabarren)로 자신의 가족을 이뤘다. 그는 “할머니는 강한 여성이었고, 또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깊은 슬픔과 생의 커다란 기쁨을 함께 간직할 수 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두고도 그는 “생은 짧기 때문에 늘 아름다운 것들을 찾고자 한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그것만이 내가 배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다.(cbc.ca) 그건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Violetta Parra)가 70년대의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의 시민들에게 축복처럼 남긴, 아나도 숱하게 들었을 노래 ‘Gracias A la Vida(생에 감사해)’의 메시지(우석균의 에세이) 이기도 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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