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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하노이, 그 이후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9.03.05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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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왔지만, 조건이 맞지 않았다. 북한은 영변핵단지를 폐기하는 대신, 2016년 4차 핵실험 후 채택한 5개 안보리결의에서 무기 부분을 제외한 민생 관련 제재를 해제해 달라고 했다. 석탄, 섬유, 수산물 수출, 석유류 수입, 노동자 송출 제한 등 실질적 고통을 주는 제재가 여기 해당된다. 미국은 영변뿐 아니라 또 한 곳의 핵시설 폐기와, 핵·미사일을 포함한 포괄적 신고를 원했다. 북한은 현 단계에서 그 이상을 내놓을 수 없다 했고, 미국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판이 깨졌다고 볼 일은 아니다. 첫째, 시기는 미정이지만, 양측 모두 추가 협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험한 비난도 없다. 대응이 신중하다. 둘째, 하노이 회담이 톱다운 접근의 약점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접근법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서로 갖고 있는 패를 다 보였다. 김정은은 이번에 영변만 폐기하되, 신뢰를 쌓는 대로 다음 단계 비핵화로 가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트럼프는 당장 포괄적인 비핵화가 있어야 한다 했다. 모호하던 입장이 분명해진 만큼, 협상 차원에서는 진일보했다. 분명해진 것이 또 있다. 소위 ‘스몰딜’은 미국의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새판을 짜는 데 한국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김 위원장과 대화하고 결과를 알려달라는 트럼프 대통령 요청도 있다.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평창에서 보여준 역량을 또 한 번 보일 때다. 지금 국내적인 처지가 어렵지만, 트럼프만큼 한반도문제 해결에 정치적 생명을 걸다시피한 미국 대통령을 본적이 없다. 천재일우 기회다. 여기까지 온 북미협상이 평화정착으로 이어지도록 한국이 촉진자로서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한미정상회담뿐 아니라, 판문점 남북정상회동을 또 할 수도 있다.

다음 단계 성공을 위해 지금 할 일이 있다. 첫째, 이번에 북미 양측은 접근법을 맞추지 못했다. 북한은 ‘단계적, 동시적’ 접근을 주장했다. 작년 7월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에 가서 ‘비핵화 우선’을 말하자, 북한은 ‘강도적 요구’라 비난했다. 금년 1월 미국은 이 전략을 접고, 새로운 북미관계 구축에 초점을 맞춘 ‘동시적, 병행적’ 접근으로 전환했다. 싱가폴에서 합의한 관계개선, 평화체제, 비핵화를 함께 추진하겠다고, 1월 31일 스탠포드에서 비건 대표가 선언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양측은 두 접근법의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채 회담에 돌입했다. 이제 미국도 비핵화에 시간이 걸린다고 인정하는 만큼, 다음 대화에서 성공하기 위해 ‘단계적 접근’을 구체화해야 한다.

둘째, 북한은 새로운 전략노선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북한이 1차 핵위기 후 2017년 ‘핵무력 완성 선언’에까지 이른 데는 ‘벼랑끝외교’가 큰 몫을 했다. 자력갱생을 기초로 고립을 감수하고 핵개발을 할 때는 유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해 국제협력을 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여기서는 보편적으로 인정된 국제규범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한 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일은 핵개발에 국력을 총동원하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중재자였던 조지 미첼은 “오래 지속된 분쟁을 풀고 공고한 평화와 진정한 화해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기나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노이 회담은 한반도 평화와 북미화해를 위한 그 긴 노력의 어디 즈음이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미래의 성취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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