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선고
※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증인’에서 주인공 양순호(정우성 분) 변호사는 “집행유예가 나오는 게 맞냐”고 묻는 의뢰인에게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의뢰인은 “제가 (변호사님 도움이 없다면) 원래는 몇 년 정도 받는 거냐?”고 질문을 던진다. 잠시 고민하던 양 변호사는 “저라면 구형 10년에 판결은 5년”이라고 답한다.
이 대화 속에는 법조계의 오랜 통설 중 하나가 담겨있다. 판사는 보통 검사 구형(求刑ㆍ검사가 판사에게 어떤 형벌을 줄 것인지 요구하는 것)의 절반 정도를 선고하는 관행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검사가 기대 형량의 두 배 가량을 구형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구형은 선고의 2배라는 이 속설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구형은 피고인이 접하는 ‘최초의 형량’
법적으로만 따지면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에 가깝다. 검사의 구형은 형사소송법 제302조(피고인 신문ㆍ증거조사 종료시 검사는 사실과 법률적용에 관한 의견을 진술하여야 한다)에 규정돼 있지만, 구형 자체는 구속력이 없다. 판사는 구형보다 낮게 선고하든 높게 선고하든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참고할 의무조차 없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판사는 이미 구형 전에 구체적 양형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며 “참고보다는 비교 대상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가 반드시 구형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심공판(심리를 끝내는 공판)에서 검사는통상 “피고인을 징역 O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짧게 구형하지만, “피고인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려주십시오”라거나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참작해 주십시오”라고 형량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실 법정에서 구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피고인 입장에선 수사부터 재판을 거치며 듣게 되는 ‘최초의 숫자’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상해 혐의로 구속기소된 의뢰인이 있었는데, 검사가 징역 2년을 구형하니 갑자기 쓰러져 통곡을 했다”며 “초범이라 실형은 피할 수 있을 거라 봤는데 구형을 듣고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호인들도 구형을 상당히 의식한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구형량을 낮춰달라거나 결과를 알아오라고 요구하는 의뢰인도 많다”며 “선고가 구형과 비슷하거나 높게 나오면 그 동안 뭐했냐는 원망을 듣기도 한다”고 전했다.
구형의 선언적 의미도 무시할 순 없다. 특히 사회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검찰의 구형은 국가가 해당 사건을 얼마나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국정농단 사건 같은 권력형 범죄나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의 경우 일벌백계 차원에서 중형이 구형되고, 피고인의 무죄를 밝히는 재심 사건에선 무죄 구형이 나오기도 한다. 이밖에도 구형은 검찰의 항소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검찰은 구형에 비해 절반 이하로 선고가 나오면 항소를 하는 게 원칙이다.
판사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도
검찰의 구형은 피고인뿐 아니라 판사에게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법학계에선 이를 정박효과(Anchoring effect)로 설명한다. 배가 닻(anchor)을 내리면 일정 범위에서만 배가 움직일 수 있듯, 검사가 제시하는 숫자가 기준으로 작용해 선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2012년 대검찰청이 52개 성범죄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된 2,733건을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형량이 1개월 늘면 판사의 선고량은 형량 0.25개월(하위 10% 평균)에서 0.78개월(상위 10%)까지 올라갔다. 구형보다 선고가 높은 사례(속칭 ‘올려치기’)는 4.8%에 그쳤다. 검찰은 “구형은 판사의 양형 결정에 주요한 영향을 주며 형량이 높아질수록 판단 착오로 인한 위험과 심리적 압박이 커져 검사 구형량에 더 의존한다”고 분석했다.
최근 경향을 살펴보기 위해 올해 확정된 판결 중 판결문에 구형량이 기재된 50개 사건을 분석해본 결과 35건이 구형보다 선고가 낮았고, 일치하는 경우는 15건이었다. 선고 형량이 구형의 절반 이하인 경우는 7건이었다. 검사 구형에서 일정 수준을 ‘할인’하는 경향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은 구형보다 너무 차이가 나게 선고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있고 양형에 확신이 없는 사건일수록 그런 경향은 심해진다”며 “대법원 양형기준이 없던 시절에는 판례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없어 검사 구형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컸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검찰 ‘뻥튀기 구형’ 지양한다지만
이처럼 구형은 검찰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쥐는 형사법 절차이긴 하지만, 구형과 선고 형량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경우가 여전하다는 것은 검찰에게 뼈아픈 일이다. ‘뻥튀기 구형’이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검찰은 2006년 “의도적으로 구형을 높게 하지는 않겠다”며 ‘적정구형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검찰 내에서는 구형을 올릴 수 밖에 없는 현상에 법원 책임도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시각이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구형을 낮추면 그만큼 선고도 함께 내려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징역 2년을 것으로 예상해 딱 징역 2년만 구형하면, 실제론 징역 1년이 선고된다는 얘기다.
다만 검찰의 구형과 법원의 선고가 굳이 비슷하게 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울고법 한 부장판사는 “검사가 응보주의(형벌은 죄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는 시각)나 엄벌주의 관점에 있다면, 판사는 중립적 심판을 하는 자리에 있다”며 “구형과 선고의 괴리는 형사재판의 이 같은 특성에 기인하는 숙명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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