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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업시민’이 지속가능 하려면

입력
2019.06.02 16: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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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시장 조사를 하던 펩시는 일부 지역의 10대 소녀 상당수가 어지러움 증상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철분 부족으로 인한 빈혈 때문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이 지역 소녀들은 철분이 풍부한 음식을 먹기 어려웠다. 그래서 펩시는 철분 성분을 강화한 비스킷을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글로벌 식품업체인 네슬레도 빈혈 예방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판매하는 건조 스프의 철분 함유량을 높였고, 유니레버 역시 빈곤 국가에 철분을 대폭 보강한 음료수를 만들어 팔고 있다. 제품을 많이 팔수록 소비자 건강까지 강화하는 효과가 나오는 것이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6명이 타이레놀을 복용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 결과 정신질환자가 타이레놀에 청산가리를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식품의약청은 해당 지역에 배포된 제품을 수거하라고 제조사인 존슨 앤 존슨에 권고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정부 권고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또 다른 모방범죄 피해를 막기 위해 시카고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의 제품을 회수해 소각했다. 당시 무려 1억달러 손해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후 타이레놀은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해열진통제가 됐다.

기업이 사회적 가치 실현에 앞장선 사례다. 이들은 ‘존경받는 기업’ 리스트에 단골로 포함된다. 그런데 냉정히 따지면 기업 입장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됐던 일이다. 노벨상을 받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시각에선 특히 그렇다. 그는 “사회에 대한 기업의 유일한 책임은 이익을 늘리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이 지역사회에 편의를 제공하고, 환경오염을 줄이며 실업자를 채용하는 등의 행동은 겉치레라는 것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부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인데 회사 비용을 들여가며 박애적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데 비용을 들여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이윤 추구 외에 사회 문제까지 해결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간ㆍ환경 친화적으로 경제 생태계를 바꾸는 ‘기업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국내에서도 활발하다.

기업 경영자들이 갑자기 ‘착함’에 눈 떠서 나타나는 변화는 아닐 것이다. 경쟁과 독점, 불평등과 양극화, 빈곤과 생태계 파괴 등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기업과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에 따르면 ‘기업시민’ 개념은 1950년대 출현해 석유파동이 세계 경제를 강타한 1980년대 주목 받았고, 최근 엑슨 모빌, 포드, 도요타, 나이키 등 글로벌 기업의 핵심 가치가 됐다.

물론 이들 기업이 처음부터 이런 가치를 추구한 건 아니다. 상당수는 아동 노동 착취, 환경 파괴 등으로 한때 국제적인 불매 운동 대상이었다. 여전히 겉 다르고 속 다른 기업도 있다. 환경 문제 해결에 목소리를 높여왔던 한 다국적 석유화학기업은 기후변화 대응에 반대하는 단체에 뒷돈을 댄 것이 드러나 비난 받았다.

이런 기업들을 진성 기업시민과 구분해 유사(類似) 기업시민이라 비판하는데, 국내 기업들도 자유롭진 않다. 국내 대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사회공헌, 윤리경영, 동반성장 등을 강조했지만 적잖은 기업들이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비민주적 지배구조 문제 등으로 비판 받았다.

진정성을 갖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시민’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기업들에게 ‘타고난 선함’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수익이 줄고 경쟁이 격화되면 기업의 이윤 극대화 본능은 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소비자다. 안전과 환경, 고용 문제에서 기업들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래야 마지못해 ‘착한 척’하는 기업이 생기고, 나중에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 기업이 늘어난다. 그러면 ‘기업시민’이 한 때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가능해질 것이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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