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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가수 겸 배우 설리는 '얌전한 인형'이 되길 거부했다. 사진 속 붉은 셔츠에 흐르는 Girls supporting girls(여성을 지탱하는 여성들)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설리 인스타그램(@jelly_jilli)

“진리야, 너는 나의 용기였어. 고마워. 미안해.”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를 위한 팬의 SNS 애도문 중 한 문장에 눈이 한참 멈췄다. 그러곤 밤새 생각했다. 설리의 용기에 대하여. 당초엔 고인의 삶에 괜한 각주를 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서사를 다 안다는 자신도 없거니와 이 전쟁터를 겨우 떠난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더 예의에 걸맞다 여겼다. 하지만 이 글을 본 뒤론 생각이 조금도 다른 곳으로 옮아가지 못했다. 설리의 삶을 기억하는 거대한 애도의 용광로에선 지금 ‘용기’와 ‘죄책감’이 펄펄 끓는다.

그는 누가 봐도 남달랐다. 여성 아이돌이 요염하되 정숙한 ‘인형’이길 요구하는 편견을 시종 거부했다. ‘공개당한’ 연애였지만 기쁨을 굳이 숨기지 않았고, 때로는 술 마시는 일상도 자연스레 내보였다. 상의 안에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사진으로 받는 부당한 비난엔 저항했다. 선배에게 ‘누구’씨라고 부르지 말라며 ‘예의’를 가르치는 무례에는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여성 연예인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결코 가만두는 법이 없는 세계에서 그건 단연코 각별한 용기였다. 그가 살아내야 했던 곳이 어디였던가. 그의 모든 동료들이 ‘감히’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고, ‘여성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쓴 액세서리를 들었다고, 말투가 충분히 더 겸손하지 못하다고, 공개당하고야 만 보통의 연애를 했다고, 비난받고 조롱당하는 광기 어린 도시였다. 세상이 원하는 조신한 행동으로 칭송받거나, 아예 사라져 도마에 오르지 않는 것 말고는 남아날 도리가 없는 땅이었다.

인형이 되길 거부하고도 비난에 굴하지 않으니 ‘논란’을 가장한 ‘폭력’은 더 집요하고 거세졌다. 판관들이 유독 빌미로 삼은 건 ‘노브라’ 이슈다. 누군가를 유혹하는 성적 신체 일부이나 스스로는 단정하고 겸손하게 동여매야 할 가슴을 편히 둔 죄, 그 몸가짐을 마음대로 생략한 죄를 세상은 무섭게 캐물었다. 정작 자기 입 단속엔 단정함이나 예의의 흔적조차 없는 이들이 남의 옷차림을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는 사이, 설리의 연관 검색어는 노브라가 돼 있었다. 말 그대로 ‘알아서 하게 두면 될’ 남의 신체를 걱정하면서 자기 윤리는 잊은 역설적 도덕주의자들의 훈계가 넘쳤다.

이 광기와 굴곡을 그래도 헤치고 살아남아 빛나길, 박수 받길 모두가 태연하게 기대했던 것이 아니냐는 자책이 도처에 흐른다. “그 폭력의 현장에 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했음을 반성한다”(17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입장문)는 회한도 넘친다. 정작 반성할 이들이 발 뻗고 자는 사이다. 설리의 도발과 성취를 내심 응원할 뿐, 더 일찍 그 폭력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더 일찍 서로를 지탱해 주지 못한 죄를 통감하는 이들만 밤잠을 설친다. ‘저항하지 마라. 앞서지 마라. 말하지 마라. 쓰지 마라. 마침내 존재하지 마라.’ 그 모든 폭언에 맞선 분투의 성공사를 용감한 한 개인에게서 보고자 했던 기대를 자책하느라.

며칠전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설리의 용기를 다룬 한 기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많은 이들이 깊이 동감할 것이다. 단지 ‘남아 있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아부어야 할지라도, 더는 누구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지하고 함께하겠다는 이들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너희의 ‘노브라’ 말고, 너희의 ‘자궁’ 말고, 너희의 ‘불법촬영물’ 말고, 더 엄중한 과업을 논해야 한다는 이들이 넘치는 시절이지만, 한 마디만 더 보태고 싶다. 설리를 애도하는 일, 또 그를 닮은 모든 영혼이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정치는 별로 없다고. 최전선은 바로 여기라고.

김혜영 정치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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