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우리집 옆에는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유난히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오가는 길에서 여학생 무리라도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딴 곳만 쳐다보곤 했다. 길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누나가 셋이나 되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법. 남중ㆍ고만 다니다 보니 더더욱 ‘여자’ 학생들과의 대면이 낯설어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최근 건축가들이 학교에 필요한 공간을 리서치하고 디자인하는 레인보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경기도교육청 산하 학교들이 각 건축가에게 배당되는데, 내가 맡은 학교가 여자중학교다. 여중생들 앞에서 꼼짝도 못했던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경기도의 한 여자중학교에 ‘메이커 스페이스’라 불리는 공간을 설치하는 게 목표다. 메이커 스페이스는 ‘창작가의 공간’이라는 이름처럼 3D 프린팅, 목공, 영상, 공예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이 이루어진다. 학생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만들어보면서 창작가를 꿈꿀 수 있는 공간이다. 책으로 배웠어요가 아니라 진짜 해봤어요라고 말하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건축가가 나서서 모든 걸 디자인하는 건 아니다. 학생, 교사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건축가는 ‘촉진자’로서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이다. 학생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귀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자료 조사차 학교 공간을 살펴보니 달라도 많이 달라졌다. 내 경험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시설들과 공간들이 학교를 권위적이고 엄격했던 시절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교실 분위기도 혁신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창덕여중 사례를 보면 획일화되고 권위적인 구조와 공간구획에서 탈피해서, 목적에 맞게 변화되는 공간을 지향한다. 교실이 되기도 하고 작업실이 되기도 하며, 그럴싸한 공연장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디자인과 마감재가 세련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하러 카페로 가기도 하는데, 학교가 이 정도는 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별다방보다는 학교지!라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다.
어떤 초등학교는 교실의 책상과 칠판의 방향을 90도 돌리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무표정했던 교실 벽과 복도, 계단 등이 눈에 잘 띄는 ‘인싸’가 되었다. 디자인의 힘이고 변화의 힘이다. 과거의 학교도 지금처럼 세심하게 디자인되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색다른 교육법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선생님들의 활동도 눈부셨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활동과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다채로운 공간을 즐기고 창작자로서 직접 만들어보면서 성취감을 느낀 아이들은 수능 성적과 상관없이 삶을 주체적이고 자신 있게 살아가지 않겠는가?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공간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자유로운 감수성과 창조성을 위해서는 학교 건축의 디자인과 공간 구성, 책상의 배치 등 공간에서 가구까지 새로워져야 한다. 도시가 변해왔듯이 학교도 시대에 따라 지속적인 변화와 개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변화된 공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자신의 시절을 만든다. 학교는 문제가 많은 곳으로만 인식되었는데, 그것은 언론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학교와 교육 환경이 부정적으로만 비쳤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사실 학교는 지속적으로 변화해 온 것이다.
학교를 방문하고 돌아온 며칠 후 수능시험이 있었다. 수능 다음 날 뉴스의 톱기사는 ‘서울대 의예과는 몇 점이면 갈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30년 넘게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기사에 한숨만 나왔다. 이런 기사가 사라지는 날이 정말 교육 혁신이 이루어지는 날이 아닐까? 언론을 바꾸기 위해서는 언론사 공간을 먼저 바꾸는 것이 어떨까?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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