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1990년 개봉한 영화다. 참 인상적인 제목이어서 글 제목으로 삼았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황금촬영상 감독상(김유진)과 이듬해 대종상 우수작품상, 남녀주연상(이영하, 원미경), 각본상(이윤택, 수감 중인 그분)을 받았다.
제목에서부터 감이 올 거다. 맞다. 남자가 아니라서 억울한 거였다. 실제 성폭행 사건을 그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대사를 한번 소환해 본다. 변호인(배우 손숙)의 최후 변론과 피고(원미경)의 최후 진술 부분이다.
“판결 전에 제가 먼저 판결을 내려 보겠습니다. 그녀는 유죄입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유죄입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세 번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여자로서, 현장검증에서 모욕과 수치 속에서 한 인권으로서, 법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까발려지면서 한 가정의 주부로서 죽었습니다.”
“네, 저는 이혼 경력이 있고, 술도 마셨고, 새벽 1시에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 강간당해도 된다는 건가요. 재판장님, 만일 또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여자들한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는 것은 안 된다고.”
서울올림픽 개막을 몇 달 앞둔 1988년 2월. 경북 영양에서 식당을 하는 32세 변월수씨는 술에 취해 가다가 지나가는 두 청년에게 식당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변씨를 골목으로 끌고가 성폭행을 시도했다. 변씨는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잘랐다.
1심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꼭 혀를 깨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며 과잉방어로 판단했다. 여성 단체들이 일어섰다. “여성의 인권은 강간범의 혀만도 못하다는 겁니까?”
이른바 ‘변월수 사건’이다. 2심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가 술을 먹었다거나 밤늦게 혼자 다녔다거나 하는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저잣거리에서 그녀는 이미 유죄였다. 술 마시고 총각을 유혹한 부도덕한 유부녀였다.
얼마 전 ‘56년 만의 미투’를 보았다. 1964년 5월 6일 성폭행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날이다. 최말자 할머니는 열여덟의 아픔을 일흔넷까지 혼자 안고 살았다.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부산지법 정문 앞. 할머니는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서’를 안고 법원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변월수 사건’ 24년 전의 일이다. 함께 길을 가다 성폭행을 하려는 이웃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자른 처녀 최말자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6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가해자에게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최씨 아버지는 돈을 주고 합의했다.
당시 판결문 요지는 이랬다. “강제 키스로부터 처녀의 순결성을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젊은 청년을 일생 불구로 만들었고… 남자로 하여금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한 도의적 책임도 있다 할 수 있으며…”
재판부의 선의로 봐야할까. 판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종용했다. (실제로 그 당시 법정에서는 판사가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를 맺어 준 사례가 더러 있었다. ‘이왕 버린 몸…’ ‘이왕 험한 꼴 당했으니…’라는 식이었다. 이게 ‘미담’으로 보도도 됐다.)
이상이다. 이게 우리의, 우리 사회의,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우리 사법부의 얼굴이었다.
최말자 할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힘이 없고 길을 몰라서 이렇게 살아왔지만 배움을 통해 용기를 내게 됐습니다. 이 시대에도 억울함을 혼자 끌어안고 있는 여성들이 많을 겁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56년이 지났는데 우리 사회는 바뀌었을까요?” 누군가는 대답해야 한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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