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적잖이 힘든 일을 겪었다. 또래에 비해 꽤 섬세하고 예민했던 아들은 사춘기도 심하게 앓은 편이었다. 때때로 칼날같이 격하게 반항하기도 했다. 나는 나름 합리적인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천성이 고지식해서 얼떨결에 아이의 뺨으로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짓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금기가 무너지고 감정이 격해지자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됐고, 묘한 착란성 전율까지 느끼면서 정신없이 폭행을 이어갔던 것 같다.
□ 일주일 가까이 잠조차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는 해쓱해진 낯빛으로 되레 아비를 위로했다. “아빠,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애들 맞으면서 크는 거 아녜요?”라며 멋쩍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럴수록 아이의 여린 어깨에 드리운 그늘이 짙어 보였고, 끝내 감정을 이기지 못한 게 참담했다. 무엇보다 선친께서는 나를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혼내지 않으셨다는 기억에 뭐라 말할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오기도 했다.
□ 아버님을 생각하면 봄날의 바람결이 느껴진다. 중학 2학년 때 6ㆍ25를 만나 집안 어른들을 한꺼번에 여의는 바람에 졸지에 식솔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학업도 마칠 수 없었다. 하지만 고달플 때 멋지게 휘파람을 불 줄 아셨고,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놀라운 건 매를 드실 때 늘 일정한 ‘체벌 의식’을 지키셨다는 점이다. 먼저 뭘 잘못했는지 일깨우고 시인토록 했고, 회초리도 아이가 갖고 오도록 시키셨다. 종아리를 몇 대 맞을지도 아이에게 결정토록 하셨다.
□ 초등학교 4학년 땐가는 교과서 쪽마다 온통 탱크와 기관총 같은 낙서로 도배한 게 들켜 종아리에 피가 맺히게 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때도 의식은 엄정히 지켜졌다. 그 덕에 아버지의 회초리는 대개 속죄와 반성의 마침표를 찍게 하는 ‘사랑의 매’가 됐다. 아버님이 그러실 수 있었던 건 점잖은 인품 덕이기도 했겠지만, 집안 어른으로 할머님이 계셔서 삼가는 습관이 몸에 배셨기 때문 아닌가도 싶다. 요즘은 세월이 격해지고 집안에 어른도 없다 보니, 자녀 훈육의 격식 같은 것도 많이 무너진 것 아닌가 싶다. 끔찍한 자녀 학대 사건이 이어지고, 급기야 ‘자녀 체벌 금지’ 법제화까지 추진된다는 소식에 이젠 사랑의 매도 옛날의 추억으로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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