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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김여사' 캐런을 위한 변명

입력
2020.07.07 04:30
수정
2020.09.02 22:40
26면
0 0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 5월 25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에이미 쿠퍼가 반려견의 목줄을 매 달라는 흑인 남성의 요청에 화를 내며 경찰에 전화를 걸고 있다. 이 여성은 이후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직장에서 해고됐다. 뉴욕=AP 연합뉴스

지난 5월 25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에이미 쿠퍼가 반려견의 목줄을 매 달라는 흑인 남성의 요청에 화를 내며 경찰에 전화를 걸고 있다. 이 여성은 이후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직장에서 해고됐다. 뉴욕=AP 연합뉴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반려견의 목줄을 매 달라고 요청한 흑인 남성을 경찰에 신고한 백인 여성 에이미 쿠퍼와 샌프란시스코 부촌에서 자택 담벼락에 낙서하고 있는 필리핀계 미국인을 "자택일 리 없다"며 경찰에 신고한 화장품 업체 최고경영자(CEO) 리사 알렉산더. 이 두 명의 백인 여성은 각자의 이름 대신 공통적으로 '캐런(Karen)'으로 불린다. 쿠퍼에게는 '센트럴파크 캐런', 알렉산더에게는 '샌프란시스코 캐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최근 미국에선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항의 시위와 맞물려 백인 특권을 조롱하는 '캐런 밈(memeㆍ온라인 유행어나 영상, 그림 등이 재창조되고 복제되는 현상)'이 유행하고 있다. 미 사회보장국에 따르면 캐런이라는 이름은 1951~68년 신생아 이름으로 인기를 끌었고, 1960년대 미 인구의 80%는 백인이었다. 이런 연유로 캐런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백인 중년의 대명사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과 반(反)인종차별 시위의 이중고 속에 캐런은 수시로 출몰한다. 뉴욕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베이글 가게를 찾은 한 백인 여성은 다른 고객이 마스크를 써 달라고 요청하자 고의적으로 다가와 기침을 해 '기침하는 캐런'으로 입길에 올랐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여성은 소매점 트레이더조에서 마스크를 착용해 달라는 직원들의 요구에 폭언과 욕설을 퍼부으며 들고 있던 바구니까지 바닥에 내동댕이쳐 '트레이더조 캐런'이 됐다.

이 같은 캐런 밈은 백인들이 인지조차 못했던 인종차별적 태도와 백인 특권의 심오한 문제를 쉽고 빠르게 자각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기원이 무엇이든 이제 캐런은 여성 혐오를 정당화하는 표현으로 변질되고 있다. 캐런 밈은 성별 관계 없이 백인들이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는 거울이 돼야 하건만 그보다는 유독 백인 여성만을 유일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는 꼬리표로 작용하고 있다. 온라인사전 딕셔너리닷컴은 캐런을 '금발 단발머리를 하고 레스토랑이나 소매점에서 상급자를 데려오라고 소리치곤 하는 인종차별주의적인 중년 백인 여성을 경멸하는 은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특정 운전 미숙자가 여성이었다는 이유로 중년 여성 다수를 비하한 한국의 '김여사'라는 표현과도 닮아 있는 모습이다.

캐런이 이처럼 인종적 위계 대신 젠더(성)를 부각시켜 오히려 인종차별 논의를 가리게 하는 성차별적 명칭이 되고 있는 배경에는 온라인 '왕따' 현상인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있다. 누군가의 실수에 망신을 주고 비판 대상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다는 가해자 지목 문화로, 캐런은 그 대표적인 표적이 됐다. 이제 백인 중년 여성들은 자신이 언제든 캐런 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정작 정당한 요구를 해야할 때조차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캐런으로 여성을 대상화할수록 백인들이 특권의식을 자각하기는커녕 공동체 분열만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캐런은 없지만 '김여사'와 '맘충'이라는 혐오적 표현이 무분별하게 사용돼 왔다. 유명 극우 사이트인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에서 유래해 여성 게임 유저를 비하하는 '혜지'라는 은어도 있다.

로마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는 "타인의 결점을 인지하면서 자신의 결점은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라고 했다. 캐런 밈의 유행으로 피해를 입었을 지도 모를 캐런 앤더슨 전 시카고 트리뷴 기자의 말을 빌린다. "이제 캐런은 은퇴시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리트윗한 동영상에서 인종차별적 구호 '화이트 파워'를 외치던 백인 남성 로저 스톡스에 관한 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좀 덜 심각하고 예측 가능한 문제를 풍자하며 밈 그 자체와 유쾌함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것일까."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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