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더울수록 입고, 추울수록 벗는 것은?”
녹음의 계절, 어린 아들과 ‘나무’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워지는 날씨에 그늘을 추구하는 아빠 탓도 있다. 아들은 시답잖은 수수께끼도 던져가며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의 혼을 빼 놓는 것 중 하나가 개미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라 곳곳에서 목격되는데, 개미집 앞에 흙으로 진이 쳐진 것을 보면 ‘내일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도 내놓는다. 오락가락하는 장마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던 적도, 한나절 시차를 두고 내린 경우도 있었다. 적중했다고는 못해도 얼추 맞았다.
세상엔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도, 솟는 것도 없다. 일이 생기기 전에 징후, 전조를 보이는 게 보통이다. 이는 개미처럼 군집 사회를 이루고 또 그 안에서 수많은 조직을 꾸려 사는 인간계서도 마찬가지. 한 조직, 기업이 망하더라도 쇠퇴 과정에선 여러 신호를 발신한다. 인재가 조직을 떠나는 게 대표적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지원하기 전에 해당 기업의 이직률을 체크하는 것도, 잘 안 되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이직률을 대외비 취급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국내 3대 성금 모금 기관 중 하나인 전국재해구호협회에서는 최근 2년 사이 13명의 직원이 퇴사했다. 2년 전 새 사무총장이 오기 전 직원 수 20명 남짓하던 구호단체다. 규모는 작아도 재해구호법에 따라 설립된 법정 단체로, 국내 자연재해에 관한 한 구호금 모금과 성금 배분에 있어 전권을 가진 기관이다. 지난 50년간 1조4,000억원의 성금과 3,000만점의 구호물품을 재난 현장에 지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석 달간 958억의 성금을 모았다.
부임 후 13명의 직원을 떠나보낸 사무총장은 “직원들이 협회에서 닦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자체 공무원 등으로 재취업했다. 자랑스럽다”고 밝혔지만, 그 이직ㆍ퇴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이 좀 다르다. “20년 가까이 하던 일을 버리고 월급 덜 주는 지방 말단 공무원으로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박한다. 사무총장에게 등을 돌리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면 협회가 과연 봉사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기관인지 의문이 든다. 남은 구호물품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했더라도 마땅히 협회 계좌로 들어가야 할 판매대금이 개인 통장으로 흘러갔고, 운영비에서 지출돼야 할 사무실 집기 구입 대금이 코로나19 성금에서 나갔다는 게 퇴사자들 주장이다. 사무총장은 의류업체에서 코로나19 구호 명목으로 기부받은 의류와 식품을 직원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의당 경쟁입찰에 부쳐야 할 협회 리모델링 공사는 사무총장 지인 업체에게 돌아갔고, 협회 사내 교육도 사무총장 지인이 맡았다.
사정이 이럴진대 협회 관리 감독 의무가 있는 행정안전부는 협회를 소 닭 보듯 하고 있다. 지난 2018년 국정감사장에서 있었던 경험치가 작동한다는 게 행안부 관계자의 해명이다. 당시 행안부는 ‘기금의 투명한 분배’를 위해 배분위원회(=협회 이사회)에 장관이 임명하는 인사 1명을 넣기 위해 관련 법 개정에 나섰는데, 일부 언론은 이를 ‘정부의 민간단체 장악 시도’라고 비판했다. 이후 ‘전국재해구호협회 기피증’ 또는 ‘협회 패싱’ 분위기가 행안부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전국재해구호협회는 1961년 신문ㆍ방송사들이 설립한 단체다. 이후 생긴 재해구호법이 별도의 법인을 통해 구호 활동을 하도록 했고, 정부는 언론사들이 만든 이 단체에 구호업무를 위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1일 기준 협회 이사 23명 중 13명이 언론사 대표 등을 지낸 전ㆍ현직 언론인이다. 반세기 역사의 협회에서 일어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규모의 직원들이 일터를 버려가면서까지 보낸 ‘징후’다. 이를 큰 둑에 난 개미구멍으로 보지 못한다면 또 다른 재앙과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민승 지역사회부 차장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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