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감싸는 언어로 피해자 탓, 언제까지
이번에도 나온 꽃뱀론ㆍ음모론ㆍ동정론
성폭력사건의 가장 명백한 증거는 피해자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국일보>
장마가 물러간 며칠 전 하늘이 청명했다. ‘늘 내 마음도 저러면 좋겠네’ 했다가 이내 서글퍼졌다. 이 순간에도 마음에 낮고 까만 먹구름이 끼었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가 떠올라서다. 이 공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을 한 남자 선배가 이렇게 표현했다. ‘박원순이 그럴 정도면 대한민국 대다수 남자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그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 여성 대부분은 일생에 걸쳐 성폭력 피해를 보고 산다고. 인지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국회 출입기자로 한 정당의 팀장을 할 때다. 3선 의원과 회사 선후배들이 저녁 식사를 했다. 반주도 곁들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갑자기 의원이 “김 반장은 왜 결혼을 안 했어?” 물었다. 대충 답하니, 돌아온 말. “그럼 나하고 연애나 하지.” 귀를 의심했다. 공교롭게도 여성은 나 혼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평온한 동석자들의 표정이 ‘내가 잘못 들었나’ 싶게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실언은 둥둥둥 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대화에 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왜 바로 받아치지 못했는지 자책했다. 틈을 노렸고 수없이 속으로 되뇐 말을 내뱉었다. “아까 그 말씀, 큰 실수하신 건데요.” 노회한 의원은 정색하고 사과했다. “아이고, 내가 진짜 잘못했어. 용서해요.”
약과인 사례다. 그런 대응을 실행할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지인에게서 당한 성희롱과 성추행이 나를 ‘훈련’한 결과다. 기자 초년 시절, 남자 취재원이 귀엽다는 듯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내 오른쪽 볼을 건드렸을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대처도 못 한 나를 스스로 얼마나 꾸짖었나. 무슨 대단한 평론가인 듯 TV에 나오는 그를 보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를 보고 그런다. 왜 4년이나 참았냐고. 고하를 따지자면 나이밖에 없는 관계에서도 심호흡 정도로는 입을 떼기도 어려운 대응을,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지닌 권력자에게 왜 곧장 시행하지 않았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여권의 대선주자이자, 대한민국 선출직 공무원 중 ‘체감서열 넘버2’라는 서울시장에게 그렇게 준엄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이 과연 있을까. 그것도 여직원을 그저 시장의 기분을 맞추는 ‘기쁨조’ 취급했다는 그 조직에서 말이다. 여덟 번이나 했다는 피해자의 인사이동 요청은 그래서 살려달라는 호소다.
우리가 피해자에게 해야 할 말은 ‘4년간 얼마나 지옥이었나요’라는 공감, ‘당신은 잘못 없어요’라는 지지, ‘혼자가 아니에요’라는 연대의 메시지다. 그런데도 사회는 가해자의 언어로 피해자를 탓한다. ‘피해자에게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음해론, ‘피해자가 자초했다’는 꽃뱀론, ‘한 사람 인생 꼭 망쳐야겠느냐’는 동정론이다. 가해자를 감싸는 논리는 이렇게 많다. 정치인뿐 아니라 교수ㆍ목사 같은 권력자가 저지른, 종류 불문의 성폭력 사건에 두루 적용되는 무서운 평행이론이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피해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피해자니까. 그게 피해자 중심주의다. 재발 방지의 의지는 가해자에게 응당한 가해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데서 싹튼다. 어느 여당 의원 말대로 집무실의 침대가 문제라면 침대를 구속시키면 되나. 고소인을 뭐라고 명명할지도 혼란스러운 이들이 많은가 보다. 앞뒤가 바뀌어서 그렇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최초 3선 서울시장으로서 평생 세운 공을 스스로 뒤엎은 그를 사회가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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