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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은 재소비의 창구다. 대세는 관찰 예능 혹은 리얼 예능이다. 개그맨뿐 아니라 가수, 배우, 아나운서, 작가, 모델, 체육인을 망라한 직업군이 출연해 자신의 일상을 무대에 올린다. 웹툰 작가인 기안84(본명 김희민)도 그중 하나다. ‘나 혼자 산다’는 그를 방송인 대열에 세워준 프로다. 웹툰 팬층을 넘어 대중에게 널리 얼굴을 알린 그는 CF, 패션 화보까지 찍으며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 기안84가 본업으로 잇따라 물의를 빚었다. 문제가 된 대목은 다르지만 이유는 한결같다. 그의 웹툰에 투영된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지난해 그는 ‘복학왕’에서 청각장애 등장인물이 “닥코티 얼마에오?”라고 말하고 ‘딘따 먹고 딥엤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렸다. 청각장애가 있으니까 발음도, 생각도 온전치 않으리라는 편견을 담았다. 더럽고 허름한 숙소를 보고 한국노동자는 불만을 갖는데, 이주노동자는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것으로 묘사해 비판받기도 했다.
□ 이번엔 여성 비하다. 보고서조차 제대로 못쓰는 능력 미달에, 사무실에서 휴대폰 게임이나 즐기는 태도 불량의 인턴 사원이 버젓이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미스터리를 그렸다. 그 비결은 나이 많은 상사와의 성관계였다. 그가 “학벌이나 스펙, 노력 같은 레벨이 아닌 완전 새로운 생존전략”이라고 묘사한 그것은, 오랜 세월 여성에게 덧씌워진 고정관념이다. 이런 서사는 차별과 혐오를 부추긴다.
□ 기안84는 “사회를 풍자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이는 풍자의 본말을 전도한 해명이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데, 그를 심려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필명부터 그랬다. “논두렁이 아름답고 여자들이 실종되는 도시, 화성시 기안동에 살던 84년생.” 그래서 기안84였다. 그에겐 이 끔찍한 연쇄 성폭력 살인사건이 ‘아름다운 논두렁’과 병치되는 가치를 지닌다. 심지어 논두렁은 범죄 현장이었다. 이쯤 되면 무지를 가장한 폭력이다. 그 폭력의 방조자는 그런 그를 계속 재소비하도록 무대에 세우는 MBC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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