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심슨가족’의 여러 장면 중 최근에도 자주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심슨가족 시즌2에 방송된 에피소드로 주인공인 호머 심슨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심슨 죽음의 5단계’를 다룬 내용이다. 심슨이 어느날 복어를 잘못 먹어 24시간 밖에 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의사로부터 ‘죽음의 5단계’ 설명을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내용이다. 의사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부정-분노-공포-타협-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고 심슨은 그런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해당 장면은 20여년 전 방송된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덕에 여전히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사실 심슨이 거친 ‘죽음의 5단계’는 단순히 애니메이션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내용이 아니라 미국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과 유사하다. 그가 1969년에 쓴 책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소개한 모델로,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구분 지어 놓았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마주한 사람의 감정이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게 되면 분노하고 이어 타협과 절망, 그리고 수용에 이르는 5단계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심슨가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 건 9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개인의 심리문제가 사회 문제로 공론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 구성원의 스트레스는 계속 심해지고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지난 8월 전국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코로나19와 사회적 건강’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 확산 이후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뉴스에서 어떤 감정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47.5%는 ‘불안’이라고 답했고 분노(25.3%)와 공포(15.2%)가 뒤를 이었다. 특히 지난 8월 초 동일한 설문과 비교할 때 불안이라고 답한 비율은 15.2%포인트 줄었지만 분노는 2.2배, 공포는 2.8배 증가했다.
이처럼 최근에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분노), ‘코로나 블랙’(모든 것이 암담하다고 여기는 상태)으로까지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회 심리적 요인이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특히 취약계층에게 치명적이라는 데에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가정 내 불화가 심해졌고, 10대 청소년과 관련된 사고도 평소보다 7~10배 급증했다. 더구나 청소년은 가정폭력이나 자해로부터 가장 취약하다는 분석이다. 사회적 돌봄에서 멀어진 장애인과 노인들도 극한 상황에 놓여 있다. 비대면 위주의 코로나19 대응책이 대면 중심의 기존 사회안전망을 마비시켜 고위험 취약계층이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 한쪽에선 상황이 코로나 블루를 넘어 심각한 수준으로 가고 있다.
다시 퀴블러로스의 ‘죽음의 5단계’ 이론에 빗대어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이미 부정과 분노, 타협의 단계를 넘어 선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절망(공포)과 수용(체념)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려면 좀 더 빠르고 촘촘한 정책적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강희경 영상사업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