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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숙 스포츠

입력
2021.03.01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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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희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감독이 16일 경기를 앞두고 인천시 계양구 계양체육관에서 학교 폭력 전력으로 중징계를 받은 팀 소속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박미희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감독이 16일 경기를 앞두고 인천시 계양구 계양체육관에서 학교 폭력 전력으로 중징계를 받은 팀 소속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몇 해 전 만난 체육계 인사는 남자 프로농구와 프로배구 각 구단의 합숙소가 사라진 것을 한탄했다. 젊은 혈기의 선수들을 풀어놓으면 관리가 안 된다며, 아침에 일찍 깨워 밥이라도 챙겨주는 게 훨씬 낫다고 합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프로라면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운동이 워낙 힘들다 보니 딴 마음 품기 쉽고, 선수들하고만 지내다 밖으로 나가면 여러 위험에 노출된다”고 둘러댔다.

최근 스포츠계는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 프로배구에서 불붙은 학폭 미투가 프로스포츠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이재영ㆍ다영 쌍둥이 자매의 합체와 월드클래스 김연경의 복귀로 어느 때보다 부풀었던 배구판의 흥행 기대는 하루아침에 급전직하하고 말았다. 배구 학투는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전방위로 번졌고, 연예계로까지 불똥이 옮겨붙었다.

첫 불씨였던 이재영ㆍ다영 자매에 대한 고발들은 단순한 선수 개개인의 인성 문제를 떠나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정이 어떻든 성적만 내면 무엇이든 용서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폭력이 용인돼왔던 이유다.

스포츠 폭력의 상당 부분은 합숙 문화에서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발표한 스포츠 분야 폭력ㆍ성폭력 판례 분석 결과에 따르면 폭력의 18.6%, 성폭력의 36%가 합숙 과정에서 발생했다.

학교 운동부에 합숙 훈련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대학 입시에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된 1972년부터라고 한다. 전국대회 성적이 좋으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어떻게든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합숙훈련이 대부분 학교 운동부로 번진 것이다. 어린 선수들은 무한의 경쟁과 함께 힘겨운 합숙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했다.

2003년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로 9명의 초등학생이 사망하면서 운동선수 합숙소 문제가 처음 공론화했다. 2019년 쇼트트랙 조재범 사건 이후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적폐의 원인이 합숙훈련에 있다며 합숙 폐지를 체육계에 권고했다. 그 영향으로 실제 학교 운동부에서 합숙훈련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정작 프로에선 아직도 합숙이 존재한다.

프로배구와 프로농구 여자부는 합숙소 생활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구단에선 갓 입단한 어린 선수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건다. 구단은 합숙이 배려와 보호 때문이라고 하지만 외국에서 온 선수들은 왜 프로가 노예 생활을 하냐며 의아해한다.

물론 합숙훈련의 장점은 크다.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경기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올림픽 선수촌을 두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국내에 스프링캠프를 차린 프로야구의 일부 구단들도 효율성을 이유로 합숙 방식의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단기간이 아닌 선수 생활 내내 이어지는 합숙이다. 다 큰 프로 선수까지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합숙은 효율성이란 이유로 가장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다. 구단은 그걸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매 맞으며 운동을 했던 지금의 지도자들은 엄격한 관리를 해야 선수들이 말을 들을 것이란 생각이 여전하다. 강압적인 통제 하의 효율만 좇다간 결국 사람도 잃고 스포츠도 잃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 합숙의 힘으로 버틸 것인가. 이제 좀 풀어주면 안 되는가.

이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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