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학창 시절 신문을 읽을 때 제일 이해가 안 갔던 문구는 '준법투쟁'이었다. 법을 지켜 투쟁을 한다는 게 당시에는 어떤 의미인지 선뜻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준법투쟁의 피해(?)를 경험해 보고는 이런 의문은 사라졌다. 시내에 약속이 있어 급히 버스를 탔는데, 마침 당시 버스 운전기사들이 '준법투쟁'을 하는 중이었다. 안전 운행을 위한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거장마다 5~10분씩 차 문을 열어놓고 정차를 하다 보니, 약속에 늦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법을 지키겠다는 기사분들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지만, 그동안 우리가 법을 안 지키고 살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이런 법을 만든 사람들은 현실을 전혀 고려치 않거나 버스를 한 번도 안 타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물러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버스에서의 기억이 오버랩됐다. 김 전 실장이 사퇴한 이유는 임대차 3법, 즉 임대료를 함부로 올릴 수 없게 하는 법이 시행되기 전 그가 먼저 전셋값을 크게 올렸다는 사실이 드러나서였다. 그가 법을 어긴 건 아니었지만, 국민적 공분은 거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김 전 실장이 그리 큰 잘못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세 들어 사는 집 전세금이 올랐을 때,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세 놓은 집이 있다면 그 집 전세금을 올려 이를 충당하지 자기 통장에 있는 돈을 잘 헐지 않는다. 그가 이 법을 주도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장삼이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뿐이다.
이렇게 보면 김 전 실장의 행동 자체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할 법한 행동을 법으로 막겠다는 생각이 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김 전 실장뿐 아니라 박주민 의원 등 여권 주요 인사들이 임대차 3법 시행 전 부랴부랴 임대료를 올려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 법이 현실을 잘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러고 보면 문재인 정부 들어 추진한 주요 정책들은 선한 의도만 강조하고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경우가 유독 많았다.
우리 사회 경제적 약자를 더 배려하자는 최저임금 인상, 전·월세 시장 안정을 위해 민간 임대주택사업자에게 준 각종 인센티브 등이 대표적이다.
좋은 의도와 다르게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부 취약계층은 오히려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민간 임대주택자사업자 제도는 부자들의 세태크 수단으로 활용되며 집값을 되레 올려놨다. 임대차 3법 역시 전셋값을 비이성적으로 끌어올리며 무주택자들의 설움을 배가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불러왔다.
민주당이 자랑스러워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를 하면서 강조했던 말 중 하나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적 감각'이다. 이상주의적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눈은 정상을 보더라도, 두 발은 서 있는 땅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르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고 새처럼 하늘을 날아볼까 하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좋게 포장해서 '이상주의자', 가치 중립적으로는 '백면서생', 냉정하게는 '무능력자'라고 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 정부 정책을 어떻게 평가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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