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하늘에서 오고 봄은 땅에서 온다. 나 어렸을 때, 봄은 이 꽃과 같이 땅에서부터 왔다. 산과 들과 마을에 지천이었다. 냉이 캐러 밭두렁에 나온 소녀들의 꽃반지가 되어준 꽃. 순이하고 분이하고 꽃싸움을 걸며 놀기도 했다.
도시에 살면서 이 꽃은 책갈피 속에 고이 접어둔 동심의 추억 속에 있는 꽃이 됐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의 양지바른 보도블록 갈라진 틈에서 보고 말았다. 수줍게 고개를 내민 진보라색 이 아이가 문득 눈에 밟혔다. 순간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이날 밤 TV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오래 잊었던 그 노래를 들었다.
이 꽃을 생각하면 먼저 이 시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 시 하나면 끝이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발견할 수 있을 거야//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사랑이란 그런 거야/사랑이란 그런 거야//봄은,/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그 사람 앞에는/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참 이상하지?/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안도현, '제비꽃에 대하여' 전문)
한국 포크계의 대부로 불린 음유시인 조동진을 좋아했다. 그가 1985년에 작사·작곡·노래한 '제비꽃'은 사회생활 초기 힘들 때 위안이 됐던 노래다. 그날 TV에서 함춘호의 기타 반주 하나에 기대 이 노래를 읊조린 장필순은 자신에게 평화를 준 인생노래였다고 말했다.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가곡 '제비꽃'은 괴테의 시에 붙인 곡이다. 나훈아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테스형'에서 뜬금없이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고 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삼월 삼짇날, 제비가 돌아올 때 핀다 하여 제비꽃이라고 한다. 춘궁기에 오랑캐가 자주 쳐들어올 때 피어서 오랑캐꽃이라고 불렸다.
제비꽃은 국민 애송시가 된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딱 맞는 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아담하면서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색깔은 볼수록 오묘하다 못해 도도하다. 그냥 보라, 그냥 자주가 아니다(흰색이나 노란색도 있다). 묘하게 신비스런 푸른빛을 띤 청자색(靑紫色), 남자색(藍紫色)이다.
그 긴 겨울을 용케 견디고 어느 풀꽃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제비꽃. 그 작은 놈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눈물 난다. 나의 나태한 눈, 무딘 감성, 더러운 욕망을 죽비로 내려치는 것만 같다.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쓸쓸한 날, 바라보는 제비꽃은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핀다. (나태주, '제비꽃1').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된다(정호승,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제비꽃은 그냥 보이지 않는다. 허리를 낮춰야만 내게 온다. 그래,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떠나가겠지만, 그 꽃을 볼 줄 아는 사람 앞에선 봄이 그냥 흘러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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