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었다. 매년 피는 꽃이건만 올해의 봄꽃은 유난히 더 반갑다. 작년 꽃이 필 무렵 비건(vegan) 지향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꽃이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필 때까지 나의 비건 지향 결심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뿌듯함과 봄이 주는 설렘이 겹쳐 마음이 잘 끓여진 스프처럼 뭉근하고 따뜻하다. 갖가지 우려와 자신 없음으로 시작한 비건 지향 생활이었는데 이제는 이 삶이 너무나 좋고 당연해서 이전의 논비건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일 년 동안 완전 채식을 지향하면서 어려운 점은 많았고 좋은 점은 아주 아주, 아주 많았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비건 지향 생활을 했을 것이다. 건강, 환경, 윤리적으로 비건이 얼마나 좋은지 길고 자세하게 쓰고 싶지만 그러기엔 나에게 할당된 지면이 너무 좁아 아쉬울 따름이다.
논비건 지인들은 비건 생활에 더없이 만족하는 나를 보고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들의 표정에서 일 년 전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과거의 내 얼굴을 마주보며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비건을 결심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맞은편의 얼굴엔 호기심이 반짝이지만 이내 빠르게 사라지고, 곧바로 심난하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뒤따른다.
“대단하다. 나는 절대 할 수 없어.”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차마 티 낼 수 없는 속상함을 느낀다. 이렇게 비교해도 되나 싶지만 내가 느낀 논비건 삶과 비건 삶의 차이는 술을 알기 전과 술을 알고 난 후의 삶처럼 다르다. 일단 알고 나면 알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구구절절 당신이 비건 지향을 시도할 수 있는 이유를 읊는 대신 명언 하나를 말한다.
“불가능은 없어.”
비건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평생 있는지도 몰랐던 눈 하나를 드디어 찾아 뜬 기분이었다. 세상의 구석이 보였다. 정육점 간판에 그려진 해맑게 웃는 돼지 캐릭터에선 잔인한 거짓이, 아무 생각 없이 즐겨 마셨던 라테 음료에선 소들의 고통이, 좋아하던 가죽 제품에선 동물들의 죽음이 보였다. 인간들이 갖가지 수로 은폐 및 엄폐한 비인간 동물들의 고통을 보며 더 이상 편안한 위선자로 살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진실들을 일부러 외면했을 뿐,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식탁 위에 멀끔하게 차려진 ‘고기’와 세련되고 예쁜 포장지에 담긴 동물성 식품 및 제품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고 믿었을 리가 없으니까.
다행히 이제는 그동안 먹어왔고, 하마터면 앞으로도 먹을 뻔했던 ‘음식’이 먹으려 하지 않았다면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살 수 있었던 동물이라는 것을, 혀의 만족감, 혹은 물욕을 위해 뜨겁게 뛰는 심장을 멈출 자격이 나에겐 없다는 점을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비건 지향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한 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여러 명의 헐렁한 비건 지향 생활이 더 많은 생명을, 더 넓은 지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감히 쉽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불가능하진 않다. 지금부터라도 일주일에 단 하루 의식적인 채식을 한다면,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을 골라 사용한다면 내년 봄꽃이 필 무렵엔 마음이 잘 끓여진 스프처럼 뭉근하고 따뜻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