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휘주 문화 ① 안후이성 징현 사제와 황산
휘학(徽?)은 실크로드의 돈황학(敦煌?), 티베트의 장학(藏?)과 함께 3대 지역학 중 하나다. 그만큼 연구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진상과 더불어 양대 상방으로 일컫는 휘상(휘주 상인)이 창조한 휘주문화가 그 중심이다. 1부 6현을 아우르던 휘주부(徽州府)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일부가 장시성과 쉬엔청시로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는 황산시로 이름이 변경됐다. 안후이성 남부의 휘주 마을로 발품 기행을 떠난다. 징현의 사제를 출발해 황산을 넘어 지시의 용천, 후이저우구의 정감, 서현의 당월과 웅촌, 후이저우고성을 지나 둔계와 이현의 서체, 노촌, 굉촌까지 이어진다. 모두 5편으로 나눈다.
무협소설 대가 김용이 사씨 집성촌에 간 이유
2018년 10월 30일 김용(金庸) 선생이 애독자를 남겨둔 채 세상과 하직했다. 향년 95세. 그의 무협소설을 읽으며 밤을 새우고,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식음을 전폐했던 사람은 모두 슬퍼했다. 마윈은 일찍이 도전과 모험을 김용의 무협으로 배웠다고 고백했다. 알리바바 직원은 무협소설 등장인물이 별호다. 마윈은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풍청양(???)으로 불린다. 저장성 닝하이에서 태어난 김용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황산 북쪽에 위치한 한 마을을 찾았다. 사씨 집성촌인 사제(??)다. 사당을 찾아 제례했다. 김용의 본명은 사량용(?良鏞)이다. ‘용(鏞)’ 자를 두 글자로 분리해 필명으로 썼다. 휘주 마을 사제를 찾아간다.
안후이성 동남부 징현(??)에서 약 1시간 거리다. 고진 입구에 사제고건축군 표지가 있다. 괄호 안의 글씨를 보니 원나라부터 명나라, 청나라 건축이 남아 있는 듯하다. 전성기에는 도랑을 잇는 다리와 사당, 사원이 모두 108개씩이던 마을이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번성했던 듯하다. 현재는 반 이상 줄었다. 지도를 보니 도랑 하나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으며 도랑 두 개는 마을 남쪽과 북쪽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다. 40개의 다리, 30개의 사당과 4개의 사원이 남았다. 여전히 작지 않은 마을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랑 옆에 보공사(?公祠)가 나타난다. 명나라 홍희제 시대인 1425년에 세웠고 청나라 동치제 시대에 중건했다. 5세조인 사보원을 봉공하는 사당이다. 친족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해 비교적 넓다. 사제에서 가장 큰 사당이다. 지붕을 떠받치는 나무 기둥과 주춧돌이 모두 14개다. 두공과 들보, 들보와 기둥이 만나는 곳마다 까치발이 지탱하고 있다. 섬세한 솜씨로 목조가 새겨져 있다.
석사자 한 쌍이 주춧돌 위에 나란히 앉았다. 원래 정렬방(?烈坊)에 있었는데 애사(哀獅)라 부른다. 남편이 죽자 부인 왕씨가 함께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선행을 널리 칭찬하기 위해 지은 패방이었다. 암사자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표정이다. 사자조차 애통했던 듯하다. 마을 사람들 마음도 마찬가지였을까? 반쯤 동강 난 성지(?旨) 편액과 함께 봉건시대의 생생한 ‘눈물’이 전해진다.
도랑을 건너는 다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무지개처럼 봉긋한 모양도 있고 그냥 긴 돌을 놓아 만든 평탄한 다리도 있다. 천신교(天申?)는 아치와 발 딛는 부위 사이에 돌을 채운 형태다. 나란히 쌍교로 꾸몄다. 형제가 어머니를 향한 효도를 경쟁하는 마음으로 세웠다. 효성이 지극한 형제였다. 공자 가라사대 ‘하늘이 군자를 보살피고, 거듭거듭 복을 펼쳐 하사한다’는 보우명지(保佑命之)와 자천신지(自天申之)에서 땄다.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고대덕자필수명(故大德者必受命)이 뒤를 잇는다. 덕이 많은 자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받게 된다고 했다. 공자가 우애 좋은 형제에게 100m 경주를 시켰다는 말이다.
길이 8m, 높이 10m인 봉긋한 다리가 나온다. 넝쿨이 수북하게 자라 다리를 온통 감싸고 5m 이상 아래로 늘어졌다. 도랑에 긴 돌판이 놓였는데 그늘 진 쪽에 아주머니 둘이 앉아 빨래하고 닭을 손질한다. 해가 바뀌면 반대 방향으로 가서 앉으면 된다. 딱 중간에 안성맞춤으로 앉을 수 있게 만든 자리다. 빨래와 닭 손질을 동시에 하는 공간이다. 다리를 지나 반대쪽에는 넝쿨이 별로 없다. 다리 옆에 2층 누각인 홍루(??)가 있어서 홍루교라 부른다. 홍루에 오르니 도랑과 다리, 민가가 나란히 이어진 모습이 보인다.
도랑을 건너 골목을 따라가니 이갑사(二甲祠)다. 명나라 말기 6세조 사기보를 봉공하는 사당으로 건축했다. 문을 여니 당호인 광유당(光裕堂) 아래 초상화 두 점이 보인다. 초록색 관복을 입은 사일위는 청나라 순치제 시대 황제를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그 정도로 공로가 매우 높아 대가왕(代?王) 작위를 받았다. 보라색 관복을 입은 사지개도 강희제 시대에 구가왕(救?王) 봉호를 받았다. 청나라에 항거한 정성공의 잔존 세력을 푸젠에서 축출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연이어 왕이 됐으니 ‘이갑(二甲)’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며 18명의 진사, 200여 명에 이르는 거인(?人)을 배출한 마을이다.
골목마다 이정표가 있어 마을을 손쉽게 유람할 수 있다. 바닥엔 반질반질한 돌이 깔려 걷기에 좋다. 명나라 시대 민가인 상의당(翔?堂)을 찾는다. 가운데 정방(正房)과 양쪽에 상방(?房)이 있는 3칸 가옥이다. 집으로 들어가니 작고한 부모의 초상화 사이에 주마루(走??) 편액이 걸렸다. 주마루는 남방에 흔히 등장하는 가옥 양식이다. 휘주 건축에 비해 색다른 품격이다. 2층이 있다는 이야기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면에 복도가 있다. 심지어 말도 다닐 수 있다는 뜻인데 약간의 과장이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병풍이 걸렸다. 팔선도(八仙?)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민간에 전래하는 전설인 여동빈을 비롯한 신선 8명을 그렸다. 서로 다른 법기를 들고 득도를 위해 동해로 가는 팔선과해(八仙?海)로 유명하다. 수많은 소설의 원형이며 명나라 시대 오원태의 신화 소설 ‘동유기’가 대표적이다. 서유기가 널리 알려졌지만 동서남북 중 하나다. 북유기, 남유기도 있다. 팔선 신앙에 대한 민간의 신망이 두터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나라 회남자의 회남팔선(淮南八仙)이나 오대의 촉중팔선(蜀中八仙), 당나라 시인 두보의 음중팔선(?中八仙) 등이 모태가 됐다는 말도 있다. 중국에선 복을 상징하는 ‘팔(八)’을 향한 예찬이 남다르다.
2층 방에 관음보살이 지긋하게 앉아있을 줄 몰랐다. 팔선과 용왕이 전쟁을 벌이자 느닷없이 관음이 나타나 일장 연설을 하고 화해하도록 권유한다. 팔선을 위한 사당이 아니니 소설과 무관하며 그저 관음의 사랑을 염원하는 공간이다. 조금 어둡지만 열린 창문으로 햇볕도 스며든다. 골목을 내다보며 수를 놓는 여인의 공간이다. ‘미인이 기대어 앉은 곳’이란 뜻으로 미인고(美人?)라 한다. 남방 가옥에 등장하는 작명인데 인간미가 넘친다. 은밀한 공간에서 살았던 여인이 외부와 소통하는 자리다. 연분 있는 총각이 골목을 지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다. 창문으로 살랑거리며 바람이 불어온다.
많이 왜소해진 사제를 둘러보는 데만 반나절이다. 북적이던 시절에 찾았다면 하루도 모자랄 듯하다. 사당과 민가가 꼭 붙어 있어 골목이 좁다. 화살표가 없으면 출구를 찾기도 쉽지 않다. 2012년에 문화부와 건설부, 재정부가 함께 제1차 ‘중국전통촌락’ 646개를 선정했다. 사제도 당연히 등재됐다. 안후이에 25개다. 문물을 보호할 마을이 많아 2013년엔 915개, 제5차에 이르면 2,666개나 ‘발굴’했다. 지금까지 거의 7,000개에 육박한다. 지독하게 넓다. 사제를 떠나 황산을 오르기 위해 달려간다.
기암괴석에 구름 바다...오악을 능가하는 황산의 매력
‘오악을 다 합쳐도 황산보다 못하다’고 하면 숭산, 태산, 화산, 형산, 항산 모두 섭섭할지 모른다. 웅장하고 수려하고 험준하고 절묘하고 현란한 오악의 특징을 다 담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운무와 소나무, 기암괴석이 만든 절경을 담고 있으니 명산이라 존경할 만하다. 상하이에서 고속철로 3시간이면 황산북역에 도착한다. 다시 1시간을 가면 남대문인 탕커우(?口)에 도착한다. 황산 공항에서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표를 끊고 전용 버스로 운곡사(云谷寺) 케이블카를 타러 간다.
봉우리 사이에 운무로 휩싸인 공간을 바다라고 부르면 어떤가? 북해, 동해, 서해도 있고 천해도 있다. 가파르게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상쾌한 기운이 발아래로부터 전해진다. 시야가 좋아 행복한 느낌이 밀려든다. 몇 번이나 황산을 올랐어도 첩첩산중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등산로 따라 북해를 마음껏 바라본다. 날카롭게 뻗은 바위에 소나무가 자란다. 바람 따라 운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절경이 보이는 관망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석순강(石??)을 보니 죽순인지 바위인지 착각이 든다.
바다 위를 걷듯 등산로를 따라 30분을 걷는다. 소나무가 아름답다는 시신봉(始信峰)에 도달한다. 다시 1시간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며 청량대(?凉台)를 지나 후자관해(?子?海) 봉우리에 도착한다. 동해를 관망하는 노른자위 위치다. 사진작가들이 둘러앉아 운무가 걷히길 기다린다. 구름은 빠르게 날아다니는 특성이 있다. 산 정상이라면 당연하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능선을 드러냈다가 가리기를 반복한다. 봉우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원숭이를 흠모한 이름일까? 산을 꼭 내려와야 하는 사람보다 낫다.
서쪽으로 이동해 배운정(排云亭)을 지난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서해대협곡이 나타난다. 운무가 사라지면 불쑥 하늘이 드러난다.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있었다는 창세 신화는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변화무쌍한 풍광을 연출한다. 갑자기 운무가 사라지니 푸른 하늘이 등장하고 구름이 스르르 지나친다. 협곡으로 내려가면 절벽을 뚫고 자란 소나무가 꿋꿋하고 꼿꼿하다. 강한 비바람에도 견디는 생명력을 연기하고 있다. 거의 2시간을 등산해야 오를 수 있는 협곡이다. 30분 정도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다. 평지보다 일찍 밤이 온다. 어둠의 막이 오르기 직전 붉은 노을이 절정으로 분출되고 있다. 운무는 은막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황산 정상에 숙소가 많다. 서해와 북해에서 한 번씩 묵었다. 비싼 편이긴 한데 비수기에 가면 그런대로 괜찮다. 북해호텔에서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공기에 이끌려 바깥에 나오니 햇볕이 강렬하다. 소나무는 늘 푸르다고 생각했는데 차오르는 운무 사이에서 빛나는 소나무가 생기발랄하다. 샛노란 소나무도 있다.
청아한 공기를 가득 마시며 등산을 한다. 해발 1,860m인 광명정(光明?)까지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숨이 턱턱 막히는 까닭은 나이 탓이다. 황산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올라야 행복이 배가된다. 광명정은 황산 일출을 관람하는 장소 중 하나다. 2007년 처음 황산에 왔을 때 굳은 마음을 먹고 새벽부터 일어나 거의 뛰다시피 올랐다. 날씨가 좋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올랐으면 내려가기도 한다. 멀리서 바라보니 평지처럼 넓은 오어봉(??峰)이 보인다.
오어봉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줄줄 흐르던 땀은 다 하늘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여기가 천해다. 사방을 둘러보면 다 장관이다. 서왕모가 산다는 신비한 곤륜산이라 해도 믿겠다. 솟구친 바위는 신이 창조한 솜씨다. 거품처럼 요동치는 운무와 뭉게구름 떠다니는 하늘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산수화의 대가라도 이렇게 멋지게 그리긴 어려워 보인다. 천지 팔방이 뚫려 있어 폭포처럼 바람이 분다. 똑바로 서서 걷기조차 힘들다. 솜털처럼 가벼운 구름이 변화무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기분으로 일선천(一?天)에 이른다. 계단도 좁고 바위 구멍도 지난다. 올라오는 등산객도 많다. 내려가기도 힘든 길이다. 백보운제(百步云梯)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름을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 100보만 걸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보(万步)라면 아무도 오르지 않을 터이니 과소평가한 명칭이다.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북새통이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며 가자니 걸음마다 조심스럽다. 중간중간에 구간을 나눠 태워주는 가마인 화간(滑竿)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데 가마가 지나가면 비키기도 쉽지 않다. 쉬엄쉬엄 내려오며 굽이굽이 돌다가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다.
황산의 상징 영객송(迎客松)이 있는 옥병루(玉??)에서 쉬어 간다. 병풍처럼 생긴 암반을 옥병와불이라 부른다. 꼭대기 부근에 마오쩌둥의 초서 강산여차다교(江山如此多?)가 새겨져 있다. 대장정 후 옌안에서 감회를 쓴 시 ‘심원춘·설(沁?春·雪)’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대한 포부를 웅변하며 ‘이처럼 아름다운 강산’이라 노래했다. 부처의 몸에 새기다니 ‘충정이 황산에까지 이르렀구나’라는 약간의 한탄도 해본다.
‘이처럼 아름다운 강산’에 어울리는 황산이다. 옥병루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황산 여행의 시작과 끝인 탕커우로 돌아온다. 황산의 정기를 받아 황산시에 두루 남아있는 휘주문화를 즐기러 발품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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