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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희생 강요…가문의 영광으로 포장된 여성 사당

입력
2021.05.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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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휘주문화 ② 안후이성 용천과 당월

안후이성 지시현 용천의 도랑과 제방길.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용제봉가'라 부른다. ⓒ최종명

안후이성 지시현 용천의 도랑과 제방길.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용제봉가'라 부른다. ⓒ최종명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임기를 마친 후진타오가 부인을 대동하고 안후이성 지시현(?溪?) 용천(龍川)을 찾았다. 2013년 9월 13일 오전, 주민 모두 일손을 멈추고 그의 한나절 귀향을 환영했다. 휘주문화가 두 명의 주석을 배출했다. 또 한 명은 장시성 장완에 조상의 뿌리를 둔 장쩌민이다. 공교롭게 두 사람의 출생지는 장쑤성이다. 장쩌민은 양저우, 후진타오는 타이저우다. 할아버지 호병형은 타이저우 일대에서 유명한 차상(茶商)이었다. 동진시대 호염(胡?)이 시조다. 1,500년도 더 지나 까마득한 48세손이 ‘황제’를 선양한 후 참배를 왔다.

용천 주민이 도랑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최종명

용천 주민이 도랑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최종명


후진타오의 조상이 정씨와 동거한 까닭은?

도랑을 따라 제방을 쌓았다. 동쪽 용수산에서 흐른 물을 막았으니 용제(龍堤)다. 도랑 길은 서쪽 봉황산까지 이어진다고 봉가(鳳街)라 한다.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용황정상(龍鳳呈祥)의 양상이다. 용과 봉황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한다. 도랑은 빨래도 하고 채소나 닭, 오리를 다듬는 자리다. 빗자루 들고 쓰레기 줍는 사람도 있다. 도랑은 동쪽으로 흘러 마을을 통과해 등원하로 흘러간다.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 ⓒ최종명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 ⓒ최종명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에 '은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에 '은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명나라 때 세운 패방이 웅장하다. 세월의 무게를 버티느라 다소 힘겨운 자세이나 꼭대기에 새긴 은영(恩?)만으로도 성은이 망극하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호종헌(胡宗?)이 진사가 되고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의 생전인 1562년에 세웠다. 4개의 기둥이 중심을 잡고 7개의 액방(?枋)이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7개의 기와가 양쪽으로 날개처럼 뻗었고 높이가 10m, 너비가 9m다. 용과 오어(??)를 비롯해 문양의 조각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흐릿하지만 반듯한 필체로 혁세상서(奕世?書)가 새겨져 있다. 호종헌에 앞서 호부(胡富)가 먼저 호부상서를 역임했다. 정확하게 한 갑자인 60년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이 진사가 됐다. 중첩의 뜻인 ‘혁’이 유난히 빛난다.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 오른쪽에 '청관소보', 왼쪽에 '청관태보'라 적혀 있다. ⓒ최종명

용천의 '혁세상서' 패방. 오른쪽에 '청관소보', 왼쪽에 '청관태보'라 적혀 있다. ⓒ최종명


용천 소보부의 호부(왼쪽)와 호종헌 상. ⓒ최종명

용천 소보부의 호부(왼쪽)와 호종헌 상. ⓒ최종명

패방 뒤쪽을 보니 청관소보(?官少保)와 청관태보(?官太保)가 새겨져 있다. 호부는 태자의 교양과 덕목을 훈육하는 소보를 맡는다. 호종헌 역시 소보에 이어 태보에 이른다. 종일품 벼슬인 소보가 된 후 저택을 건축했다. 도랑 건너에 소보부가 있다. 당시 문인이자 서예가인 문징명이 쓴 이품세은(二品世恩) 아래 호부 석상이 있다. 선비의 자태다. 옆방에는 갑옷을 입고 무장한 호종헌 동상이 있다. 남방 해안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던 시대다. 항왜 장군 척계광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용천의 향현사 본당. ⓒ최종명

용천의 향현사 본당. ⓒ최종명


용천 향현사의 초상화. 왼쪽 2번째가 요절한 주원장 부장 호수영이다. ⓒ최종명

용천 향현사의 초상화. 왼쪽 2번째가 요절한 주원장 부장 호수영이다. ⓒ최종명

바로 옆 건물은 향현사(?賢祠)다. 정면 벽에 시조를 비롯해 남북조와 송원명청으로 이어지는 왕조, 민국과 신중국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의 이름과 직위가 적혀 있다. 초상화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몇 대손인지 숫자를 대사(大寫)로 썼다. 세(世)의 고어인 세(?)도 특이하다. 조상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관복이나 대학자 차림인데 생김새가 유난히 다른 인물이 있다. 이십구세주원장부장(貳拾玖?朱元璋部?) 호수영(胡秀英)이다. 이름도 딱 여성이다. 원명 교체기에 주원장 군대에 종군했으며 27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역사에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인물인데 용천에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두건과 머리 장식인 건괵(巾?)은 여걸, 수염과 눈썹인 수미(?眉)는 대장부를 상징한다. 수미건괵은 남자보다 뛰어난 기개를 지닌 여장부를 말한다.

용천의 호씨종사. ⓒ최종명

용천의 호씨종사. ⓒ최종명

호씨 집성촌의 종사를 찾는다. 기본 구조는 명나라 건축물이지만 조형 예술을 비롯해 내부 장식은 대부분 청나라 품격이다. 대문 너비는 22m, 7칸 크기로 양쪽 2칸은 벽돌로 막았다. 이중 처마의 헐산식(歇山式) 지붕은 대와(黛瓦)로 덮었다. 지붕 마루 끝으로 8개의 창각(?角)이 날개를 펼친 듯하다. 양 끝에 지붕을 감싸고 있는 분장(粉?)은 바람을 막고 화재가 번지는 것을 예방한다. 말머리처럼 생긴 마두장(馬頭牆)이 뛰어나갈 기세다. 휘주 건축물은 사당이나 민가나 분장대와(粉?黛瓦)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휘주에서 시작해 강남의 여러 지방으로 전파됐다.

용천 호씨종사의 문신과 석사자. ⓒ최종명

용천 호씨종사의 문신과 석사자. ⓒ최종명

대문과 중문 사이 공간이 3.4m다. 두 개의 호(戶)가 합쳐 문(門)이 된다. 호에 그려진 문신이 휘황찬란하다. 양손으로 긴 칼을 잡고 오색찬란한 갑옷을 입고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등에는 깃발을 꽂았다. 수염을 보니 관우와 장비로 보인다. 두 장수가 지키는 문은 단단히 잠겼고 양쪽 측문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후진타오가 왔을 때는 당연히 ‘수문장’이 문을 열었다. 석사자 한 쌍이 앉아 있으니 관리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용천 호씨종사의 본당. ⓒ최종명

용천 호씨종사의 본당. ⓒ최종명

본당은 가로와 세로가 22m, 17m가 넘는 공간이다. 그 정도만큼 하늘로 뚫린 천정(天井) 덕분에 내부가 환한 편이다. 기둥이 주춧돌 위에 우뚝 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은행나무라고 하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지름이 1.66m나 된다. 가로로 시선을 두면 들보가 기둥과 만나고 있다. 원둘레처럼 생겨 동과(冬瓜)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이, 호박, 수박처럼 박과 식물로 통통하다. 중국 요리에 흔하게 올라오는 재료다. 문짝인 선(扇) 사이 열린 공간으로 시조인 호염 초상이 살짝 드러난다.

용천 정가사당의 천정. ⓒ최종명

용천 정가사당의 천정. ⓒ최종명

동쪽의 쪽문으로 들어가니 정가사당(丁家祠堂)이 나타난다. 사당 안 사당이라 놀랐다. 21세손 호염오가 족장이던 북송 시대였다. 가문을 빛내기 위해 몇 대에 걸쳐 후학이 과거에 응시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족장도 다치는 일이 발생하고 마을에 우환이 잦았다. 마침 관리를 그만두고 주유하던 뇌문준이 왔다. 풍수지리에 해박한 인물로 유명하다. 환대를 받고 해법을 제시했다. 사당 자리가 마치 선박 같다고 했다. 호(胡)는 현지 발음으로 물에 뜨는 부(浮)와 비슷하니 배를 고정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 그러니 닻과 생김도 같고 못(釘)이기도 한 정가와 동고동락하라 했다. 곤궁하게 살던 정씨 부부가 용천으로 이주했다. 제사 지낼 때 정씨 조상도 대우하라 했다. 정씨와 함께 살자 진사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셋방살이 형국이니 천정도 훨씬 좁다.

용천 정가사당의 도깨비 같은 문양. ⓒ최종명

용천 정가사당의 도깨비 같은 문양. ⓒ최종명

호염오는 정씨 가문의 지나친 번성을 우려했다. 풍수 대가는 정씨 조상의 무덤 위치를 지정해 이장하라 했다. 닻에 못이 너무 많으면 배가 가라앉으니 뱃머리에 두라는 의미였다. 대가의 솜씨였는지 모르나 정씨 후손은 외아들만 태어났다. 단정(單丁)은 형제 없는 남자를 뜻하는 말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무려 24대에 걸쳐 단전(單傳)했다는 기록이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천정 처마 옆에 OX판처럼 생긴 물건이 보인다. 마치 도깨비처럼 생겼는데 노려보는 듯한 모습에 귀여운 해학도 담겼다. 큰 나라에 예속돼 살아가는 운명을 부용(附庸)이라 한다. 용천에 온 정씨 부부는 주인의 눈치를 살폈고 풍수 대가의 체면도 고려했음직하다. 슬기로운 ‘부부생활’만이 가문을 지키는 길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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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월의 포찬효자방. ⓒ최종명

당월의 포찬효자방. ⓒ최종명

용천을 떠나 서남쪽으로 1시간 거리의 당월(棠?)로 이동한다. 중국에서 패방이 가장 많은 마을일 듯하다. 3개는 명나라, 4개는 청나라 시대에 세웠다. 패방군(牌坊群)이라 부르며 포씨(?氏) 집성촌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용을 곱씹으려는 계획이 다소 빗나간다. 모두 기둥이 4개인 형태다. 구분하려면 글씨나 문양을 봐야 한다. 포찬효자방(??孝子坊)이 가장 앞쪽에 있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인물인 포찬은 공부를 잘했는데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리가 썩어가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다. 백약이 무효였고 포찬은 오로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결국 병이 치유됐다. 효행이 소문나고 패방을 지으라는 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나랏님의 뜻이라는 의미의 성지(聖旨) 글자가 또렷하다.

당월의 자효리방. ⓒ최종명

당월의 자효리방. ⓒ최종명

자효리방(慈孝里坊)이 가장 오래됐다. 명나라 영락제 시대인 1420년에 세웠다. ‘송사(宋史)’ 기록에 따르면 휘상(徽商)이던 포여암, 포수손 부자가 반란군에 체포됐다. 둘 중 하나를 죽이겠다고 하자 서로 죽여달라고 경쟁하며 간청했다. 반란군조차 칼을 내리칠 수 없었다. 자애와 효성의 상징으로 널리 퍼졌다. 영락제가 국고에서 건축하고 주민을 위무했다. 청나라 건륭제가 강남 순행 당시 ‘자효천하무쌍리(慈孝天下無雙里), 곤수강남제일향(袞繡江南第一?)’이라는 대련을 남겼다. 정말 무쌍이다. 마을에 대한 칭찬이다. 게다가 두 왕조의 황제가 극찬하다니 ‘둘도 없는’ 패방이다.

당월의 총보정과 패방군. ⓒ최종명

당월의 총보정과 패방군. ⓒ최종명


당월 포상현상서방에서 본 패방군. ⓒ최종명

당월 포상현상서방에서 본 패방군. ⓒ최종명

26세부터 수절한 강씨절효방(江氏節孝坊)을 지나면 총보정(?步亭)이 나오고 뒤쪽에 패방 4개가 나란하다. 소금 장수인 포숙방 부자의 선행을 칭찬한 악선호시방(樂善好施坊), 22세에 시집와 29세부터 수절한 오씨절효방(吳氏節孝坊)이 이어진다. 다음은 포봉창의 효자방(孝子坊)이다. 14세부터 전국을 수소문해 수천 리 떨어진 간쑤성까지 찾아가 병든 아버지를 구해 귀향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환이라 다시 저장성의 명의를 찾아내 무사히 치료했다. 이렇게 4개가 청나라 시대 패방이다. 마지막은 포상현상서방(鮑象賢?書坊)이다. 가장 앞쪽 패방의 주인공 포찬의 증손자가 진사가 됐다. 사후에 공부상서로 추증돼 패방을 세웠다.

당월의 포씨종사 돈본당. ⓒ최종명

당월의 포씨종사 돈본당. ⓒ최종명


당월 포씨종사의 중문 문신과 측문 문신. ⓒ최종명

당월 포씨종사의 중문 문신과 측문 문신. ⓒ최종명

비에 젖어도 의연한 패방을 보고 포씨종사로 돌아온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처음 건축했고 청나라 가경제에 이르러 중건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은 문신이 가로막고 있다. 측문으로 들어서니 돈본당(敦本堂)이다. 천정이 넓고 마당에는 빗물이 고인다. 하늘이 내려주는 복이니 곧 재물을 상징한다. 사수귀당(四水歸堂)은 휘주 건축의 요체다. 물은 고이면 썩으니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마을로 골고루 흘러가도록 한다. 포숙방 부자의 자선을 칭찬한 패방처럼 돈본당 편액도 낙선호시(樂善好施)다. 측문으로 나서려고 돌아보니 문신이 보인다. 중문과 양쪽 측문 모두 문신이 있다. 6명이 지키니 감히 귀신도 함부로 들어오긴 힘들겠다.

당월의 여성 사당인 청의당 입구. ⓒ최종명

당월의 여성 사당인 청의당 입구. ⓒ최종명

포씨종사를 남사(男祠)라 부른다. 그 이유는 바로 옆에 청의당(?懿堂)이 있어서다. 가운데 글자 의(懿)를 분리해 자획을 나누면 초심이라는 뜻인 일차심(一次心)이다. 일(壹)은 일(一)이다. 1805년에 소금 상인인 포계운이 세웠다. 남존여비가 투철한 시대, 포씨 여성을 봉공한 사당이다.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다. 휘주 상인으로 성장하는데 공헌한 여성을 위한 사당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경천동지다.

당월 여사인 청의당에 '정효양전'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당월 여사인 청의당에 '정효양전'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파란색 바탕의 정효양전(貞孝兩全) 편액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절과 효행은 둘 다 완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청나라의 학자 증국번이 찾아와 남긴 글씨다. 당시 만청중흥(??中興)의 명신이었으니 자격이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양(兩)에다가 약간의 장난을 쳤으니 가까이 가서 살펴본다. 경(?) 안에 종(?) 대신 구(求)를 썼다. 완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절과 효행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니, 요즘 세상에 증국번이 살아온다면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당월 여사인 청의당의 '복아운잉' 편액. ⓒ최종명

당월 여사인 청의당의 '복아운잉' 편액. ⓒ최종명

청의당 뒤쪽 침전에도 숨이 끊어질 듯한 글자가 있다. 포씨 가문을 빛낸 7명의 여성 신위가 있다. 나무 기둥에 빽빽하게 경구가 적혀 있고 들보 위에 복아운잉(福我雲?)이 눈에 들어온다. 잉(?)은 복(福)이자 8대손을 뜻한다. 나로부터 생긴 복이 끝없이 이어지라는 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늘 복선이 있다. 눈여겨보니 아(我)를 끊었다. 제2획인 ‘一’을 싹둑 단절해버렸다. 여성들의 희생 정신을 잊지 말라는 충고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나가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숨이 좀 막힌다.

당월 여사인 청의당 마당에 고인 물. ⓒ최종명

당월 여사인 청의당 마당에 고인 물. ⓒ최종명

청의당 마당에 파릇파릇 풀이 자란다. 빗물을 먹고 생기발랄하다. 위를 바라보면 정효양전이요, 복아운잉이다. 아래로 시선을 두니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 당월을 떠나 다른 휘주 마을로 간다. 또 어떤 문화가 숨어 있을까? 기대를 담아 휘주 발품을 계속한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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