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편의점에는 천의 얼굴이 있다. 말쑥한 진열장 뒤엔 고군분투 끝에 창업에 뛰어든 가맹주의 사연이 즐비하다. 누군가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요구에 억울함을 삼키는 을이 되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생 등에게 가혹한 갑이 되기도 한다. 불야성 뒤엔 각종 갑질을 감내하며 꿈을 곱씹는 노동자의 한숨도 넘친다. 주휴수당을 떼먹는 점주나 폭언ㆍ폭력을 일삼는 진상 손님을 견디는 아르바이트 점원이 불도 꺼지지 않는 편의점의 24시를 지탱한다.
그뿐일까. 삼각김밥 등 소박한 한 끼 식사를 찾는 학생ㆍ노동자ㆍ독거 노인. 식사 후 한쪽의 의자에 기대 콜을 기다리는 각종 플랫폼 노동자. 본인도 종일 격무에 시달렸지만 정작 소비자가 되는 순간 돌연 떵떵거리기 시작하는 갑질 손님. 편의점 등장 후 위기에 처한 인근 골목상권 상인. 없는 제품도 없지만 없는 사람도, 없는 비명도 없다.
이 창구에선 가히 ‘고통의 올림픽’이 열린다. 그리고 우리는 온ㆍ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며 꽤나 다툰다. 누가 누가 더 힘든가. 어떤 것은 더 가깝고 선명하게 보이는 탓에 자주 도마에 오르고, 어떤 것은 실재하지만 눈에 보이진 않는 탓에 간과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장 덜 묻는 질문도 있다. 애당초 이런 을들의 각종 고통들은 누가 유발했나. 혹은 방치했나.
정치권의 ‘편의점 접근법’도 갈린다. 최근 국민의힘 소속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얼굴에 조명을 댔다. 김웅 의원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노동자가 철판에 깔려 죽은 현장이고, 임대 전단이 날리는 빈 상가이며, 삼각김밥으로 한 끼 때우고 콜을 기다리는 편의점”이라고 했다. 이준석 전 최고위원은 편의점의 주 소비층이자 이벤트 포스터 속 손가락 모양이 남성혐오로 의심된다는 점에 화가 난 유권자들의 주장을 옮기며 “정신 나간 것 (...) 왜 책임자에 대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밝히지 못하는 걸까”라고 물었다.
한쪽은 주로 죽음과 빈곤으로 내몰린 을의 분노를, 다른 쪽은 주로 언제 무시를 당할지 몰라 화가 난 남성을 대변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어지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문제를 시각화하고 해결책을 찾는 정치의 역할에 충실한 건 어느 쪽일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편의점 자화상과 관련해 눈길을 끈 한 연구가 있다. ‘청년 불안정 노동자의 자본주의 미시세계’(한국사회정책)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와 김우식 전국금속노동조합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썼다. 편의점 및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심층 분석했다. 짧게 옮길 내용은 아니나 특히 와 닿은 대목은 이렇다.
“노동자들은 그들을 통제하는 조직을 구축한 회사가 아니라 (…) 현장 관리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고 (…) 같은 임금을 받으면서 덜 일한다고 생각하는 노인이나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 노동자들 간의 연대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본 대 노동이라는 거시균열의 지점에서만이 아니라, 곳곳에 나 있는 미시균열의 장소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미시균열에서 저항’은 수당을 떼먹는 점주나 갑질 손님을 고발하는 투쟁 등을 말한다.
두 가지를 시사하는 걸로 읽혔다. 우리의 삶과 정치에서 오로지 거대 자본과의 싸움이라는 뼈대만 남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얼굴 없는 승자가 조용히 빠져나간 뒤, 연령ㆍ성별이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로 그 분노를 대신하는 패턴은 근본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는 이 갈피 잃은 분노를 명백히 이용한다. 편의점의 소비자ㆍ노동자ㆍ가맹점주로 표상되는 한국 사회의 숱한 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둔탁한 틀로 갈라 자신의 표를 결집하는 정치, 이런 나쁜 정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권력 그 자체’ 말고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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