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년 전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방영될 무렵 ‘공감능력도 능력이다’라는 요지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드라마 속 자사고 전교 1등 예서가 매번 국어 1번 문제를 틀리는 건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 결여된 문제고, 뛰어난 지성이 공감능력을 상실하면 만인에게 고통을 주는 범사회적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지성이 결여된, 감수성으로 무장한 그들이 좋아할 기사.’
잠깐 기분 나쁜 상태가 가시니, 희한하게 10년 전쯤 썼던 학술 기사들이 하나씩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 시절 훌륭한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듣고 썼는데, 그 기억을 복기할 때마다 한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약자를 보호하고 부자가 양보해야 된다는 식의 올바른 말하기는 얼마나 손쉬운가. 지금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얘기를 연구랍시고 한 거냐며, 지적 태만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었겠지만 그들만큼 디테일이 약했던 나는 단순하고 정의로운 결론에 종종 감동했다.
정부 정책 발표를 볼 때면 저 파도를 떠올리곤 한다. 부자 때려잡겠다는 선한 의지로 시작한 정책이 양극화를 심화시킨 경우는 부동산 분야에 한정된 게 아니다.
학교 서열화로 입시 부담을 심화시킨다며 교육부는 2025년 자사고?외고?특목고 폐지를 예고했지만, 이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근거리 배정 원칙’으로 시험 한번 안 치고 명문고에 입학할 ‘강남 8학군 인근 거주’ 학생들일 터다. 같은 해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본인 시간표 짜는’ 고교학점제가 시행돼 인근 명문고끼리 통합과목을 개설하면 지역별 양극화는 더 심화될 게 분명하다. 만에 하나 교육부가 선전한 대로 대학과 고등학교가 공동과목을 개설하는 일이 생기면 주요 명문대 인근 동네가 ‘명문학군’으로 부상해 일대 집값이 뛸지도 모르겠다.
집권 초기 수능 절대평가 도입을 검토했던 이 정부는 조국 전 장관 자녀 입시비리 의혹 이후 정시 확대로 역주행했다. 명분은 공정성 강화라는데, 입시에서 다양성을 줄이는 만큼 사교육을 부추기고 명문학군 쏠림 현상을 가속화시킬 터다. 인공지능(AI)시대에 문·이과 통합형 수능을 실시하면서, 이과계열을 지망하려면 수학 선택과목으로 ‘확률과 통계’가 아니라 ‘미적분’을 치르도록 입시제도가 설계됐다.
백년대계인 교육정책만은 정권에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며 만들자는 기구(국가교육위원회)는 소속 위원의 과반을 대통령과 여당 추천 몫으로 해 국회 문턱도 넘기 전에 ‘제2의 방송통신위원회’ 소리를 듣고 있다. 그나마 방통위 업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구분이라도 되는데 국가교육위원회가 교육부 대신 맡게 된다는 ‘중·장기 정책’은 기준이 불명확하다.
정부는 집권 내내 학생 수 줄어드는 걸 지켜만 보다가 올해 초 지방대 신입생 대량 미달 사태가 벌어지자 대학 정원 감축 방안을 내놨는데, 이 와중에 대선 공약이라며 건물도 없는 지방대(한전공대) 개교를 허락했다. 더 큰 문제는 선의로 포장된 이 정책들이 대부분 ‘다음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된다는 점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68세대가 구좌파를 비판한 이 말은 심히 아재스러워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건만 이보다 지금 현실에 딱 맞는 말을 찾기 어렵다. 무지한 선의는 공감능력 결여보다 위험하다. 오만한 선의는 무지한 선의보다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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