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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건 고려 말 우왕 때인 1377년이다. 하지만 아직 활자는 글자마다 크기가 다를 정도로 조악했고, 활판에 밀랍으로 고정하는 방식이어서 인쇄 중에 활자가 흔들리는 등 생산성이 목판보다도 떨어졌다. 15년 후 조선이 건국되자 체제 정비 등을 위해 서적을 대량 보급할 필요가 커졌다. 그래서 태종이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해 1403년부터 5년 동안 구리활자 수십 만 자를 만든 게 ‘계미자’다.
▦ 계미자는 고려 금속활자 기술을 계승해 만든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다. 그러나 활자 주조와 제판, 인쇄기술은 여전히 미흡했다. 주조기술이 떨어져 활자의 획이나 크기는 여전히 불규칙했고, 밀랍 고정방식도 여전했다. 수시로 활판을 손봐야 해서 하루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이 고작 10장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계미자 개량을 위해 세종대왕 즉위 초기인 1420년에 ‘경자자’가 새로 제작됐으나 기술적 한계는 여전했다.
▦ 혁신이 이루어진 건 1434년(세종 16년)이다. 왕은 공조참판이자 당대의 과학자였던 이천은 물론, 천문학자로 후에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김돈,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장영실 등 쟁쟁한 멤버들을 활자 제작에 투입했다. 당연히 주조가 정교해지면서 활자 크기가 고르고, 자판 네모가 반듯하며, 활자체도 해정(楷正ㆍ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했다고 한다. 특히 밀랍 고정에서 탈피해 죽목(竹木)으로 활자 사이 빈틈을 메워 제판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 세종이 당대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이 활자가 바로 조선 금속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다. 특히 이 시기엔 1443년 훈민정음이 반포되면서 한글활자도 처음으로 만들어져 ‘월인석보’ 등의 간행에 쓰였는데,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칭한다. 다만 갑인자는 조선 말까지 6번 개주되면서 되레 퇴보했는데, 세종 때의 초주(初鑄) 갑인자나 당시 한글활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최근 서울 인사동에서 발굴된 항아리에서 초주 갑인자와 당시 한글활자일 가능성이 높은 활자 등이 1,600여 점이나 나왔다니, 학계가 들썩일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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