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허베이성 서부 ② 장자커우 공중초원과 바오딩 청서릉
태행산(太行山)은 북위 34도에서 43도에 걸쳐 있다. 허난성 서부에서 허베이성 북부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750㎞에 이른다. 동경 110도에서 114도 사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남도 진도에서 함경북도 김책 앞바다까지라 생각하면 된다. 서쪽은 고원이며 동쪽은 평원이다. 최고봉은 해발 3,061m의 오대산이다. 남북으로 1,000m 정도 고도 차이가 나는 가파른 산맥으로 명산이 줄줄이 이어진다. 융기와 침식을 거듭한 지각운동으로 산을 넘어가는 지레목이 생겼다. 예로부터 팔형(八?)이라 했다. 산맥을 가로지를 수 있는 험로가 여덟 곳이라는 말이다. 비호형(飛狐?)은 북쪽에서 두 번째다.
'72굽이 40리길'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
장자커우 위현(蔚縣)에서 남쪽으로 15㎞ 이동해 비호욕(飛狐?) 입구에 도착한다. ‘여우가 날아다녔다’는 협곡으로 기억하면 편하다. 칠형은 모두 동서로 횡단인데 비호형만 남북 종단이다. 골짜기를 도로로 포장해 차량 이동이 가능하다. 빼죽한 일주향(一柱香)이 보인다. 높이 32m 돌기둥이 바위산에서 갈라져 나와 틈이 생겼다. 갈라졌다는 뜻으로 봉탑(縫塔)이라 부른다. 흉노족 토벌에 공을 세운 서한 시대 장군 이광과 거란족에 항거한 북송 시대 장군 양연소가 지났다는 전설이 있다. 말을 세우고 기둥에 고삐를 붙들어 맸다는 이야기로, 전마주(?馬柱)라는 과장이다. 명나라 병부시랑을 역임한 양시창은 ‘우뚝 솟은 고봉이 떨어져 곧추섰는데, 빼어난 암석이 하늘 기둥과 같다(孤峯屹離?, 秀巖若天柱)’고 노래했다. 역시 전설보다는 시가 아름답다. 길옆 연못에 비호(飛狐) 바위가 선명하다. 여우는 날아가고 없다.
'72 굽이 40리길’ 명성을 지닌 비호욕이다. 40리길에 40개의 멋진 풍경이 나타나고 72번 굽이굽이 돌아갈 때마다 동굴이 있다고 했다. 우회전과 좌회전 할 때마다 절경이 반복된다. 여우가 날아다녔을 법한 좁은 길도 나타난다. 곳곳에 크고 작은 동굴이 보인다. 여우가 지나다닌 구멍일까? 차를 세우고 도로를 걸어본다. 차량도 그다지 많지 않다. 한여름에 찾아가도 약간 서늘한 편이라 걷기에 좋다. 그야말로 사십리대협곡(四十里大峽谷)이다.
서서히 협곡이 사라지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잘 보이지 않던 하늘도 차츰 드러난다. 차량 꽁무니를 따라가면 마제량(馬蹄樑)이다. 말발굽처럼 높고 평탄한 고개다.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태행산 자락의 고원 초원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길은 자주 꼬불꼬불하고 게다가 비포장도로다. 차량은 황토를 휘날리며 느린 속도로 서쪽으로 서행하기 시작한다. 양떼가 낭떠러지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바야흐로 초원에 들어선 느낌이다. 비포장 산길 13㎞를 더 달리면 이름부터 멋진 공중초원(空中草原) 입구다.
공중초원과 인연이 많아 다섯 번이나 갔다. 여름 피서로 제격인 여행이다. 2018년 8월 11일에 갔을 때다. 초원 입구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하늘이 여느 때와 달리 야릇했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이시간이면 한여름에도 해가 중천이다. 붉은빛이 감돌더니 주변이 온통 까맣게 변해갔다. 함께 갔던 사람들 모두 조용히 환호를 질렀다. 일식이었다. 바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놀람 그 자체였다. 태양의 오른쪽 위를 갉아 먹은 듯한 부분, 바로 달의 위치다. 달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머릿속에서는 아주 가깝다. 부분일식이라 완전 어둠의 세상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일식, 공중초원의 하늘이 어찌 평생 기억에 남지 않겠는가.
입구는 늘 복잡하다. 해발 2,158m인 고원 초원으로 면적이 36㎢나 된다. 한여름에도 시원해 피서지로 유명하다. 8월 하순을 넘기면 추워서 식당이나 숙소가 문을 닫는다. 초원을 일주하는 도로가 있고 차량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론 1인당 입장료와 차량 진입 비용을 받는다. 비포장도로라 황토가 마구 날아다니는 분위기조차 기분이 좋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초원 한가운데 언덕 부근에 호텔이 달랑 하나 있다. 추억이 아직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도착할 즈음엔 늘 늦은 오후라 짐을 풀면 곧바로 초원을 만끽하러 돌아다녔다.
천천히 5분 정도 걸으면 풍력발전기가 있다. 도로에서 떨어져 있어서 한가하다. 바람도 센 편이다. 말과 양의 식당이며 놀이터다. 초원이 깨끗해서 그런지 동물 특유의 냄새도 없다. 시원한 바람과 여유로운 햇살, 마냥 한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풍력을 일으킬 정도로 세찬 바람에도 구름은 그저 순백의 빛깔을 드리운 채 미동이 없다. 귀가를 서두르는 양 울음소리만 아니면 정지화면 속에 머무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해가 서산을 넘어간다. 맑은 날이 대부분이라 일몰도 예쁘다. 이 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시간을 멈추기 위해 손을 펼쳐 해를 잡으면 멋진 사진으로 남는다. 초원의 진정한 별미는 양 바비큐다. 한 마리를 주문하면 대략 20명 정도 먹을만하다. 1,200위안(약 20만 원)으로 가격 변동이 거의 없다. 주인이 양을 잡는 모습을 봤다. 우리로 가장 뒤늦게 들어가는 양을 잡는다. 왜냐고 물어보면 그저 웃기만 한다. 거의 2시간을 숯불 위에 올리고 돌리고 또 돌린다. 초원에서 먹는 양고기도 잊지 못할 맛이다. 가끔 양이 달리는 모습과 동그란 눈이 떠오르기도 한다. 초원의 밤은 길고 길다. 폭죽을 쏘고 캠프파이어를 즐길 수 있다. 모두가 잠든 사이 별과의 데이트도 있다. 불이 다 꺼지고 나야 훨씬 잘 보이는데 취기 때문에 일찍 자면 별빛 데이트는 없다.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카메라로 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초원의 아침은 싱그럽다. 기상 나팔과 함께 양떼는 이미 우리를 나섰다. 말도 낙타도 관광객을 위해 몸매를 다듬고 있다. 아침식사 후 초원 도로를 한 바퀴 돌아본다. 전동차를 타고 가다 경치 좋은 장소에 멈추면 된다. 어디를 봐도 노트북 배경화면이다. 숙소로 돌아오면 말과 마부가 기다리고 있다. 마부 대장에게 미리 연락하면 인원만큼 말이 등장한다. 초원에서 승마만큼 기분 좋은 유람도 없다. 말을 골라 타고 초원 속으로 들어선다. 마부가 끄는 말이라 안전하다. 질주는 허락하지 않으니 낙마해도 다치지 않는다. 달리라고 소리를 질러도 말은 그저 걷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을 뿐이다. 마부를 잘 설득하면 보안장치를 풀 수도 있다. 제주도에서 말을 좀 타 본 사람이라면 시도해도 좋다.
만자천홍(萬紫千紅)... 황홀한 들꽃 세상
말에서 내려 야생화 가득한 초원을 만져본다. 공중초원의 안내문에 따르면 1,500종류가 넘는 꽃이 핀다. 말 위에서 볼 때와 달리 화려한 꽃밭이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이어진다. 활짝 오밀조밀하게 피어난 초원이다. 그야말로 만자천홍(萬紫千紅)이다. 가장 반갑게 방긋 웃는 꽃은 양귀비다. 공중초원의 양귀비는 샛노랗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바닥 대부분을 장악한 터줏대감 같다. 워낙 많아서 보고 있으면 황달이 생긴 듯 눈이 아프다. 엎드린 채 하늘을 향해 바라보니 4대 미인의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양귀비는 중국어로 앵속화(罌粟花)라 하는데 별명도 많다. 아편의 원죄를 뒤집어썼지만, 야생에서 마음대로 핀 꽃이라 그런지 예쁘기만 하다.
양귀비만큼 우후죽순 자라는 꽃은 에델바이스다. 중국어로 훠룽차오(火絨草)인 국화과 식물이다. 원색도 아니고 색이 튀지 않은데도 곳곳에 뿌리박고 있어 꽤 많이 보인다. 주변에 자주색을 자랑하며 발랄하게 자란 솔체꽃이 있다면 조금 빛이 바랜다. 한여름에 피는 솔체꽃은 란펀화(藍盆花)라 부르며 산토끼꽃과 식물이다. 솔체꽃 사이에 함께 핀 꽃이 있다. 디위(地?)라 부르는 오이풀이다. 멋대가리 없이 길쭉하고 진한 갈색의 밤톨 만한 꽃이 핀다. 보랏빛이 선명한 제비고깔도 초원의 캔버스를 수놓고 있다. 중국 이름도 멋진데, 추이추에(翠雀)이나 페이옌차오(飛燕草)로 불린다. 참새나 제비처럼 훌훌 날아가려 하는지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다. 여름이면 야생화 때문에라도 공중초원이 자꾸 생각난다.
초원을 가르는 승마의 행렬이 많다. 시선을 약간 돌리니 야생화 속에 푹 빠진 말 한 마리가 보인다. 휘날리는 말갈기와 꼬리가 유난히 멋지다. 흉터 하나 없이 몸매도 깔끔하다. 이런 말을 준마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꽃밭에서 알록달록한 꽃보다 더 아름답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면 한 편의 영화 같으리라. 날씬한 몸매가 아니라면 슬픈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공중초원에 피는 야생화는 8월 초부터 보름 정도 볼만하다. 비가 내린 후 며칠 지나 날씨마저 쾌청하면 그야말로 조상에게 감사할 일이다.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었더라도 준마가 포즈를 잡아야 금상첨화가 아닐까?
공중초원을 떠나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가끔 양떼가 도로를 점거한다. 양떼는 서두르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먼저 건너고 마지막으로 다 이동할 때까지 행동 대장이 지켜본다. 유심히 지켜보면 나름대로 규칙에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 초원으로 올 때 낭떠러지에서 만났던 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세하게 살폈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이다. 어서 지나가기나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 황제에게 공산당의 자비는 없었다
태행산 비호형은 위현과 라이위안(?源) 사이에 있다. 라이위안을 지나 80㎞ 동쪽 청서릉(?西陵)으로 간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황릉이 세 군데다. 첫 도읍인 선양에 조상의 무덤인 조릉과 태조 누르하치, 태종 황태극의 능원이 있다. 베이징에 진출한 후에는 허베이 동북에 있는 쭌화에 능원을 조성했다. 이후 옹정제가 바오딩 이현에 능원을 조성했다. 자연스레 동릉과 서릉으로 나뉘게 됐다. 세 곳의 황릉 모두 묶어 세계문화유산이다. 베이징 황제는 순치제부터 선통제까지 모두 10명이다. 청동릉에 다섯, 청서릉에 넷이 묻혔다. 마지막 황제는 황릉이 없다. 건축양식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하다. 청서릉 숭릉(崇陵)에 도착한다.
황릉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숭릉은 광서제와 융유황후의 합장 무덤이다. 주차장에서 300m를 걸어가면 패루가 나타난다. 패루를 지나 융은문(隆恩門)을 통과하면 융은전이다. 황제와 황후의 신위가 봉공돼 있는 사당이다. 제례를 오면 신위에 예를 갖추고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수행하는 인원이 거처하거나 제례 도구 등을 보관하는 배전이 양쪽에 있다. 물론 정문부터 곳곳에 순찰 업무를 보는 순방(巡房), 제례 음식을 만드는 신주(神廚), 관리가 머무는 조방(朝房), 잡역을 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반방(班房)도 있다. 융은전을 지나면 침궁으로 들어가는 삼좌문(三座門)이 나타난다. 경사가 있는 계단이 있고 문이 3개라는 뜻이다.
삼좌문을 들어서면 황궁에서나 사용하는 돌로 제단을 마련했다. 기단 위에 다섯 개의 물건이 쌓여 있다. 가운데에 향로가 하나, 옆에 화병과 촛대가 두 개씩 놓였다. 이를 석오공(石五供)이라 한다. 황릉에는 모두 설치돼 있다. 당연히 그 뜻이 고귀하다. 향화영왕(香火永旺)이니 향로는 영원히 왕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선화상개(仙花常開)와 신화불멸(神火不滅) 역시 화병과 촛대에 무한한 염원을 은유하고 있다. 황실 여성이 제례를 올리는 장소다. 공주이건 귀비이건 석오공까지만 들어올 수 있다.
봉건 왕조의 마지막 황릉인 숭릉은 1909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광서제가 붕어한 다음 해다. 1915년에 준공했다. 청나라 말기 조정의 열악한 정세와 재정으로 규모가 이전 황릉에 비해 많이 축소됐다. 1938년에 무덤인 지하 궁전이 도굴당하는 망신까지 당했다. 당시는 군벌이 할거하던 시기였다.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무장 군인들이 침궁을 도굴해 부장품을 가지고 달아났다. 제대로 수사했다면 체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시대였다는 것이 광서제에게는 불행이었다. 그 덕분에 청서릉에서 유일하게 지궁을 개방하고 있다. 무덤을 보는 일이 꼭 행복만은 아니다.
순치제와 강희제가 청동릉에 만년길지(萬年吉地)를 조성하고 지하 궁전에 영면했다. 옹정제가 서쪽으로 황릉을 옮겼으니 세간의 말이 많았다. 강희제의 뜻과 달리 황위를 찬탈했기에 곁에 있기 두려웠다는 의심의 눈초리다. 옹정제가 자기만의 공을 세우길 좋아하고 거만하다는 시샘도 했다. 빨래터에 아낙이 모여 조잘거리는 소리와 다름없다. 사료에 따르면 재위 당시 강희제 무덤 옆에 위치를 정해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공사 도중에 모래와 자갈이 너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학자에게 자문하니 형세가 좋지 않았다. 결국 서쪽에 조성했다. ‘비록 수백 리 떨어졌어도 둘 다 수도와 가깝고 모두 신주(神州)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옹정제는 마음 편하게 눈을 감았다. 후대 황제는 서로 교차해 조성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는 평민 푸이(溥儀)로 여생을 마쳤다. 평민이던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센에게 유언을 남겼다. 청서릉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마오쩌둥 정부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1967년 사망한 푸이는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에 있는 능원에 묻혔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끝내 유지를 받들기 어려웠던 리수센은 폐암으로 사망하기 2년 전인 1995년에 푸이의 유골을 이장했다. 사설 능원인 화룽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이다. 숭릉 지궁 담장에서 불과 200m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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