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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나쁜 사회' 탓이다

입력
2021.08.07 04:30
수정
2021.08.09 13:2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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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상처를 남기지 않는 모성애가 가능할까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 장면. 자유를 즐기던 한 여성에게 아들이 생기면서 180도 바뀌는 삶을 그린 이 영화는 사랑할 수 없는 아들을 끝까지 홀로 사랑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그려내 전 세계의 호평을 얻었다. 다음영화 제공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 장면. 자유를 즐기던 한 여성에게 아들이 생기면서 180도 바뀌는 삶을 그린 이 영화는 사랑할 수 없는 아들을 끝까지 홀로 사랑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그려내 전 세계의 호평을 얻었다. 다음영화 제공

솔직히 말하자면 임신은 여성인 내게 전혀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 아래 가진 아이여도 마찬가지다. 내게 자기결정권이란 목숨처럼 소중해서 이를 지키기 위해 가족은 물론 연인, 친구, 나아가 사회와도 끝없이 싸워왔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이 내 몸 안에 존재하다니! 의지를 가지며 움직이고 자라난다니! 내가 먹은 영양분을 빼앗기고 나와 세포가 섞이며 내 몸속 장기와 뼈들의 위치를 뒤집어 놓는 존재라니. 너무도 이질적이다. 낯설다. 태동을 느끼는 순간 내게 밀려올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공포일 것 같다. 나는 주변 또래 친구들과 달리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지만, 스스로 정직하게 돌아보건대 임신을 다소 징그러운 일로 여긴다.

두 번째 두려움은 이것이다.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나는 아이와 영원한 족쇄를 차게 될 것이다. 그의 운명에 절대로,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끝없는 자기검열과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들 것이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는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얼마간 무작위적이다. 아이가 잘 자라도 칭찬받지 못할 것이지만 아이가 잘 자라지 못할 때 그 책임과 탓은 오로지 어머니인 나의 몫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두렵다.

책 '다섯째 아이'는 아들 벤이 태어난 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마저 이 아이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에 홀로 고투를 벌이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았다. 민음사 제공

책 '다섯째 아이'는 아들 벤이 태어난 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마저 이 아이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에 홀로 고투를 벌이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았다. 민음사 제공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여성 작가 도리스 레싱은 여성이 갖는 이러한 근원적인 공포를 책에서 잘 드러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됐다니. '다섯째 아이'는 낯선 아이를 낳게 된 여성의 이야기다. 엄마인 해리엇은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그가 '괴물' 같다고 느낀다. 주변 사람 모두 벤의 '다름'을 알아차리지만 대화는 늘 핵심을 피해간다. 평행선을 달린다. 의사는 알면서도 계속해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해리엇은 벤을 런던의 큰 병원으로 데려간다. 레싱은 이렇게 쓴다.

"의사는 부모 없이 애만 먼저 보기를 원했다. 그건 현명해 보였다. 해리엇은 혼자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마도 이번 의사는 현명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혼자 반문했다. 이번에는 내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마침내 누군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고 그래서 고통을 같이 짊어졌으면 했다. 아니, 그녀는 구출받기를 기대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만큼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이해받기를 원했고 그녀의 곤경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해리엇은 단지 이해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곧 스스로 냉소한다. '그래, 넌 뭘 기대하니!'

우울증은 엄마 탓일까?

그래픽노블 '당신 엄마 맞아?' 표지와 한 장면. 작가 앨리슨 벡델은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전작 '펀홈'에서와 달리 어머니를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기 힘든 대상이며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존재로 그린다. 정신의학 역사에서 오랫동안 엄마는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움직씨 출판사 제공

그래픽노블 '당신 엄마 맞아?' 표지와 한 장면. 작가 앨리슨 벡델은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전작 '펀홈'에서와 달리 어머니를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기 힘든 대상이며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존재로 그린다. 정신의학 역사에서 오랫동안 엄마는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움직씨 출판사 제공

2030 여성 우울증을 취재하는 작업을 오래 하고 있다. 이제는 작업의 막바지로 곧 책이 나온다. 내가 만난 많은 여자들이 아빠보다도 엄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빠는 미워하기 쉽다. 단순하게 미워만 하면 된다. 그러나 엄마는 미워하면서도 이해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엄마 이야기를 하며 여자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사랑과 미움이 섞여 있는 모순된 기억들이다.

엄마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정신질환과 모성애를 연결 지으며 '나쁜 엄마'를 비난해 온 역사가 유구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고통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여성혐오에 기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신질환과 모성애의 관계에 대한 연구 대부분은 여성혐오적인 남성 연구자가 아니라 당시 영향력 있는 여성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시작됐다. 이들은 유아기 때 맺는 엄마와의 관계가 정신병리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고 봤다. 엄마의 부족한 사랑은 대단히 많은 것들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유아 사망, 청소년 범죄, 참전군인의 신경쇠약, 동성애, 조현병까지.

셸 쇼크(Shell shock)는 전쟁 중 많은 병사들이 고통을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은 이명, 기억 상실, 떨림, 소음에 대한 과민증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했는데, 당대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신경쇠약의 원인이 이들을 충분히 '남자답게' 키우지 못한 어머니의 양육 방식에 있다고 봤다. 영국 사진 작가 돈 매쿨린(Don McCullin)이 1968년 베트남 전쟁 중 찍은 사진 속 병사가 셸 쇼크의 전형적 증상인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국 테이트 뮤지엄 홈페이지 캡처

셸 쇼크(Shell shock)는 전쟁 중 많은 병사들이 고통을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은 이명, 기억 상실, 떨림, 소음에 대한 과민증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했는데, 당대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신경쇠약의 원인이 이들을 충분히 '남자답게' 키우지 못한 어머니의 양육 방식에 있다고 봤다. 영국 사진 작가 돈 매쿨린(Don McCullin)이 1968년 베트남 전쟁 중 찍은 사진 속 병사가 셸 쇼크의 전형적 증상인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국 테이트 뮤지엄 홈페이지 캡처

문제는 어머니가 요구받는 모성애의 이상적인 형태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해왔다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따뜻하고 친밀하고 지속적인 것으로는 부족했다.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주어져야 했다. 과잉 보호를 해도 문제였고, 너무 차가워도 문제였다.

1940년대 정신과 의사들은 지배적인 엄마, 과도하게 걱정하는 엄마, 지나치게 꼼꼼한 엄마, 완벽주의 엄마, 집착하는 엄마가 조현병 자식을 만든다고 봤다. 이 같은 관점은 확대되어 엄마와 자식 간의 관계, 나아가 가족 안의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가 조현병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럴 때마다 조현병 자식을 둔 부모는 "우리 가족은 평범했다"고 항변했지만 의사들은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에 아이에게 병이 생긴 것이라고 답했다. 누구도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신경생물학에 기반한 조현병의 뇌과학적 증거가 속속 발표되면서 정신의학계는 가족들의 말을 믿어주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수십 년 동안 사랑이 없는 가족이라고 검열당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조현병 환자의 돌봄 제공자였으며 탈원화 운동을 통해 조현병 환자를 시설에서 꺼내온 운동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가족 탓'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엄마와 딸이 서로 미쳐서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주 비난의 화살을 피해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 질환을 가족 간 역학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 온 참전군인이 돌아와 일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그를 너무 '여성스럽게' 키운 엄마 탓이겠는가.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군인들의 표정. 위키피디아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군인들의 표정. 위키피디아

정신질환의 문제를 생물학적 요인으로만 분석하든, 정신역동학적으로 분석하든 둘 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모든 정신질환은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발현된다. 같은 병을 앓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회 안에서 앓느냐에 따라 환자의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진다.

'가족 탓'은 마치 수렁과 같아서 비난에서 누구도 헤어나기 어렵다. 완벽한 가족이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어떤 측면에서건 문제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평범했어요. 문제가 없었어요. 아이의 병은 우리 탓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입증 가능하지가 않다. 누구도 이들의 역사를 세세히 살펴볼 수 없고 각 가족 구성원의 기억 역시 다르며 그것마저 가변적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질병을 설명하는 정신분석학이 반증 가능하지 않기에 과학적이지 않다고 봤다. 포퍼는 과학의 논리는 증명이 아니라 반증에 있다고 봤다. 과학은 끝없는 추측과 반증을 반복하며 발전해간다. 통념과는 달리 옳음이 아니라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과학인데, 정신분석학은 애초에 틀렸음을 증명할 수 없기에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금 하는 작업이 만약 이삼십대 여성을 인터뷰이로 설정하지 않고 사오십대 여성을 인터뷰이로 설정했다면 모성에 관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풀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역할을 해내려 하지만 도저히 닿지 않는 좋은 엄마라는 이상향. 모든 걸 다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내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상황들. 이삼십대 여성의 우울만큼이나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믿어주지 않는 고통이다.

엄마들은 어쩌면 곁에 남아 버틴 사람들이기에 미움의 대상이 됐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홀로 아픈 자식을 돌보는 여성이 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정하기가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누구보다 이 같은 모순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울증 당사자 여성들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우울을 설명하며 오로지 가족을 원인으로 두지 않았다. 엄마를 향해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그녀 또한 가부장제 안에서 고통받는 존재임을 알았고 이해하려 애썼다.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해가는 방식 역시 엄마에게 사과를 요청하거나 더 나은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독립된 존재임을 알고 서로의 삶을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양육의 궁극적 목표는 자녀의 건강한 독립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목표가 너무도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생을 갈아 넣어 끝없이 인내하며 사랑한, 그래야만 했던 존재를 최종적으로는 내게서 떠나보내는 것이 목표라니. 왼쪽을 보며 동시에 오른쪽을 봐야 하는 상황 아닌가. 삶에서 추구할 만한 것들은 어째서 늘 이렇게 어려운가.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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