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때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서 내가 한두 줄이라도 읽은 책이, 읽지 않은 책보다 많았던 적이 있다. 예스24 베스트셀러 10위까지 읽지 않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낀 적도 있다. 출판 담당 시절 얘기다.
그때 자주했던 취미 중 하나는 포털사이트 ‘지식인의 서재’ 코너에서 그들이 추천한 책 리스트를 보며 ‘지식인의 지성’을 가늠하는 거였다. 몇 년간 국내 신간 표지와 목차를 거의 다 읽다보면, 그들이 추천해준 책이란 게 자기 전공 저서와 일간지 신간 리뷰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추천 책 100권을 소설과 시집으로 빼곡하게 채우는 문인의 신간을 밀쳐둔 건 그때부터다.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책 한 권 추천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인간을 논하고, 사회를 논하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 코너에 출연한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요한 건) 책이 아니고 당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만든 준거집단은 누구입니까. 누구와 토론을 했습니까. 이런 질문일 것 같다.” 준거집단.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는 사회학 용어로 개인이 자신의 신념?태도·가치와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기준으로 삼는 집단이다. 소속 집단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유명 인사의 아무말 대잔치가 도래할 때, 이상한 입법안과 정책이 도래할 때, 그들의 준거집단은 누굴까 종종 생각한다.
주 120시간 노동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대선 예비후보는 ‘건전한 페미니즘’론으로 ‘(처가) 돈은 있는데, 가오가 없다’는 비아냥을 사더니, 후쿠시마 발언으로 지지율 급락세를 타고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의 추정처럼, 이제 정치를 시작한 그가 페미니즘이나 후쿠시마 원전에 대단한 철학을 갖고 저런 말을 하진 않을 텐데, 그게 진짜 문제다. 주변에 저런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데, 집권하면 그들이 나라 살림을 맡을 테니. 부동산 가격 잡겠다면서 기본소득 주겠다는 앞뒤 안 맞는 공약 낸 대선 예비후보나, 대통령 되겠다면서 별다른 공약조차 내지 않는 분들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다. 전공이 ‘뻥’인 사람이 득시글거리거나, 주변에 ‘브레인’이 없다는 소리니까.
교육계도 준거집단 문제들이 넘쳐난다. 전교조 출신 해직 교사 특혜 채용 의혹으로 공수처 1호 수사 대상이 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새 시대정신에 맞다고 판단했다”는 궤변을 내놨는데, 10년 새 교원 노조조직률은 27%에서 3%로 줄었다. 역대급 국가 부채가 쌓이는 와중에 유기홍 국회 교육위원장은 전국 교육지원청에 ‘부교육장’직을 새로 만드는 법을 발의해 ‘세금 들여 옥상옥 만드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구청에 부구청장이 있듯 부교육장이 있어야 '급'이 맞다는 명분인데, 구청장은 선출직이지만, 교육장은 임명직이다.
시대정신을 매번 업데이트해왔던 조한혜정 교수는 그 비결을 세상이 바뀔 때마다 준거집단을 바꿔가며 사유를 확장한 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시대 맥락을 놓고 읽을 때는 좋은데, 맥락 모르고 읽으면 독이 되는 책이 많다. 같이 모여 읽을 때는 쓰레기 같은 책은 안 본다. 그런데 혼자 책을 보면 계속 쓰레기 같은 책을 보면서 고민한다.”
각종 ‘도래’를 보면, 시대 소명을 다하고 쓰레기가 된 책을 다 같이 읽고 고민하는 기적이 있을 것 같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