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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

입력
2024.12.3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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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김준희(맨 오른쪽)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노조 지부장이 지난 9월 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함께 공익신고한 동료들과 '류희림 방심위원장 민원 사주 의혹'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준희(맨 오른쪽)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노조 지부장이 지난 9월 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함께 공익신고한 동료들과 '류희림 방심위원장 민원 사주 의혹'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들! 아빠가 오늘 상을 받은 건 시키는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

지난 19일 민주언론시민연합 40주년 기념식장.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노조 지부장인 김준희는 틀에 박힌 수상 소감 대신 어린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날 회사 동료인 지경규, 탁동삼과 함께 '민주언론시민상'을 받았다.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을 공개적으로 폭로한 내부고발자들이다.

스스로를 "평범한 월급쟁이"라고 말하는 세 사람의 삶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건 꼭 1년 전이다. 회사에서 벌어진 이해 못할 일들에 문제 제기한 게 발단이 됐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국민권익위원회에 '류 위원장이 가족, 지인 등을 동원해 뉴스타파 '김만배·신학림 녹취록'을 인용해 보도한 언론사를 심의해달라고 민원을 넣었다'고 신고했다.

직장 대표격인 위원장을 신고하는 건 버거운 일이었지만 눈감기엔 사안이 너무 무거웠다. 방심위는 방송사 보도 내용 등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사후 심의하는 기관이다. 만약 류 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주장을 다룬 특정 보도 내용을 처분하려고 가까운 이들에게 민원 청탁을 했다면 절차적 정당성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실제 방심위는 뉴스타파 보도를 인용한 MBC·KBS·JTBC·YTN 등 4개 방송사에 총 1억2,0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류 위원장은 이 심의에 참여했다.

내부고발자들은 류 위원장의 친동생과 친척, 전 직장 동료 등이 무더기로 관련 민원을 제기한 정황을 찾아냈다. 민원인의 이름, 이메일 주소 등을 단서 삼아 인터넷을 뒤져 모은 증거다. 이들이 낸 민원은 오탈자까지 같았다.

방심위 내부 게시판에도 류 위원장 가족의 민원 사실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는 등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조직은 이를 외면했다.

결국 김준희와 지경규, 탁동삼은 권익위의 문을 두드렸다. 류 위원장의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여부 등을 가려달라고 요청했다. 7개월간 질질 끌던 권익위는 '판단하기 어려우니 알아서 조사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방심위로 돌려보냈다. 그사이 류 위원장은 "내부자들이 민원인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며 신고했다. 경찰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공익신고자 등의 자택과 휴대전화,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고분고분 살지 않은 대가라 여겼지만 가혹했다.

권력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그 가치는 언젠가 드러난다. 김준희는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지켜보며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감했다고 한다. 군과 경찰의 최고위 지휘관들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대통령의 지시에 복종하거나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제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평생 자랑스러워했을 그들에게는 어떤 명예도 남지 않게 됐다.

낯익은 풍경이기도 하다. 잘나가던 엘리트 관료 중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대꾸 없이 따르다가 고꾸라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당장 박근혜 정권 때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돕다가 공직 생활의 비극적 말로를 맞이했던 이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김준희와 지경규, 탁동삼. 그리고 방심위 직원 다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준희는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말을 가슴속에 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유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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