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허베이성 서부 ⑤ 창저우 오교잡기와 한단 황량몽여선사, 혁명열사능원
둔황 막고굴 제156굴에 들어서면 양쪽에 벽화가 있다. 오른쪽에 위치한 북쪽 벽화가 송국부인출행도(宋國夫人出行圖)다. 왼쪽인 남쪽 벽화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와 대칭이다. 당나라 시대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 이후 786년에 토번(티베트)이 둔황을 점령한다. 62년이나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통치했다. 장의조가 토번을 쫓아내고 당나라에 귀의한다. 벽화는 귀의군 절도사 장의조의 송국부인이 행차하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역사(力士)가 십(十) 자 모양의 긴 장대를 머리 위에 올리고 있다. 양 끝에 어린이 둘, 중간과 꼭대기에 하나씩 모두 4명이 재주를 부리고 있다. 이런 곡예를 정간(頂竿)이라 부른다. 무희와 악대가 함께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한나라 시대 이후 백희(百?) 산악(散樂) 잡극(雜劇) 잡악(雜樂) 잡사(雜?) 파희(把?) 등으로 불렀다. 절묘한 기예를 통칭하는 서커스다. 가짓수도 많다. 기기묘묘한 온갖 공연을 다 포함한다. 우리말로 곡예라고 하면 비슷하다. 장대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거나 차력으로 벽돌을 깨고 동물이 등장하며 마술도 있다.
중국은 1950년대에 국가급 예술단체를 만들며 잡기단(雜技團)이라 했다.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의 작명 솜씨다. 좋은 이름 다 두고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잡기 발원지는 곳곳에 많다. 오교잡기는 일반명사에 가깝다. 허베이 창저우(?州) 시에 속한 우챠오(吳橋) 현으로 간다.
아이들도 다 보는데... 괴기·살벌·아찔한 곡예
우챠오는 산둥성 더저우(德州)와 붙어있다. 허베이성 동남부 끝이다. 기차역은 우리나라 1960년대 시골 역전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촌구석이다. 천천히 걸으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오교잡기대세계 입구가 황금빛으로 번쩍거린다. 가면을 디자인했다. 구멍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라는 듯하다. 2006년에 국무원이 제1차 무형문화유산에 선정했다. 국가급 관광지라는 말이다. 1,000개가 넘는 서커스 종류가 있고 ‘하나라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는 동네다. 입장권을 보니 크게 6곳으로 나눠져 있다.
먼저 활계동물원(滑稽動物園)으로 간다. 활계는 ‘익살맞다’는 뜻이라 아이들이 많다. 물론 어른도 많다. 원숭이가 재롱을 피우니 귀엽다. 곰도 자전거 타고 돌아다닌다.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아이들은 철조망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난리가 났다.
그냥 익살스러운 동물원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온갖 재주를 부린다. 곧이어 마이크를 든 조련사가 관람객을 유혹한다. 아이들은 감히 나오지 않고 어른 몇 명이 안으로 들어간다. 훈련된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 등에 올라탄다. 함성이 우레 같은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촬영이 빠질 수 없다. 사진을 인화해 판매한다.
2011년 베이징의 겨울이었다. 동악묘(東嶽廟)는 연초에 세시 풍속인 묘회(廟會)를 연다. 한 해의 기복을 빌러 사람이 몰려든다. 좌판을 펼치고 전통 행사가 열린다. 단연 서커스가 최고 인기다. 이때 당당히 ‘중국오교(中國吳橋)’ 간판을 내건 절기(絶技)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흰 쥐가 나타나 쪼르륵 이리저리 움직인다. 수박 구멍을 지나고 빙그르르 바퀴도 돌고 줄도 탄다. 방향을 잃었다가 다시 갈 길을 찾더니 겨우 집으로 쏙 들어간다. 얼굴을 살짝 내밀면 환호성이 장난이 아니다. 길들인 쥐라는 순백서(馴白鼠) 또는 쥐의 성곽이란 노서곽(老鼠郭)이라 불린다. 실제로 우챠오에서 다시 보니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경극 가면이 걸린 성문이 나타난다. 강호문화성(江湖文化城)다. 강과 호수는 온 세상 천하를 뜻하니 무림 고수를 만날 수 있으려나 보다. 왁자지껄한 박수갈채가 요란하다. 취파천(吹破天) 전승자로 유명한 허수썬이다. 날라리나 태평소처럼 금관 악기는 다 분다. 담배 피우며 콧구멍으로 날라리 두 개를 불기도 한다. 연기가 솔솔 새어 나온다. 태평소는 너무 커서 귀청이 터질 듯하다. 심지어 주전자로도 불어대니 모두들 폭소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청만으로 악기와 똑같은 소리를 낸다. 이를 카시(??)라고 한다. 인간의 목소리에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천교파식(天橋把式)이 나온다. 천교는 보통명사로는 육교이지만, 베이징의 지명이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남쪽에 서커스 기인인 팔대괴(八大怪) 문화가 형성된 광장이다. 파식은 파세(把勢)와 동의어로 무예·무술을 하는 사람이나 기예를 뜻한다. 행동이 날랜 젊은이가 아니라 노익장을 과시하는 기인 둘이 등장한다. 맨손으로 벽돌을 깨는데 두부보다 부드럽게 부서진다. 단장벽전(單掌劈?)이다. 박수를 유도하던 기인은 차마 설명이 난감할 정도로 살벌한 무예를 펼친다. 작두로 만든 계단을 오르내리는 상도산(上刀山)은 위험한 축에 들지도 못한다. 짧고 긴 도구들이 이목구비 속으로 들락거린다. 아이들도 많은데 정말 이래도 될까 싶다. 차마 사진을 첨부하지 못한다.
다음은 잡기소원(雜技小院) 마당이다. 관중을 꽉 채워 대문부터 인산인해다. 주전자, 국자, 부채, 줄, 접시, 우산, 의자 등 가정에서 사용하는 용품을 이용한다. 아기자기한 서커스다. 그렇다고 코미디 수준은 아니다. 입으로 국자를 물고 직각으로 뒤집개와 접시가 똑바로 균형을 잡는다. 주방에서 요리하다 심심해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낚싯대처럼 길고 휘는 장대 위에 접시를 올리고 돌린다. 입안 가득 종이를 집어넣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킨다. 귓속으로 통과한 바람이 종이를 태운다. 연기가 나더니 갑자기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입에서 오색 종이가 뒤따라 나오는 뒤풀이도 있다. 긴 줄을 코에 걸고 힘껏 당긴다. 거뜬하게 어른 몇 명을 끌어온다.
오교잡기대세계는 도시의 전문공연장과 사뭇 다르다. 관중과 기인이 함께 호흡하는 광장과 비슷하다. 촌스럽기도 하고 조금 괴기스럽고 살벌한 동작도 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추억을 남긴다. 국가급 관광지에 자본이 투자되더라도 그냥 딱 이대로의 모습으로 남으면 좋겠다. 군데군데 세운 조각상도 왠지 친밀하게 느껴진다. 관중과 거리가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챠오를 가려면 제법 교통이 불편하다. 평일 대낮이라도 올 사람은 다 온다.
한단지몽, 한단지보... 고사성어의 땅
서남쪽으로 270㎞ 거리에 있는 한단(邯鄲)으로 간다. 우화로 가득한 ‘장자’에 추수(秋水) 편이 있다. 전국시대 위모가 공손룡에게 일침을 놓는다. 남의 뒤를 따라하면 자신을 잃는다는 교훈을 던진다. 한단지보(邯鄲之步)다. 연나라의 수릉 사람이 한단 사람의 멋진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원래대로 걷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포복으로 되돌아갔다. 진시황이 태어난 고향으로 전국시대 칠웅으로 군림한 조나라 수도였다. 조왕성유지(趙王城遺址)에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바퀴 둘러보고 발걸음을 옮겨 황량몽(黃粱夢)을 찾아간다.
도교 사당인 여선사(呂仙祠)에 도착한다. 조벽 중간에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고 네 귀퉁이와 지붕에도 용이 빼곡하다. 붉은색만 보면 흥분이 되는지 군데군데 낙서가 여럿이다. 공산당 중앙에 대한 찬사, 당과 인민에 대한 애정이 과하다.
옛 도관이라는 한단고관(邯鄲古觀)이 걸린 산문을 들어선다. 오른쪽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단방(丹房)이 나온다. 도교에서 불로장생을 위한 단약을 제조하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도사에 대한 존경을 뜻하기도 한다.
봉래선경(蓬萊仙境) 석각이 있다. 당나라 시대 유명한 도사인 여동빈의 필체로 알려진다. 다만 세 글자만이다. 신비한 전설 때문이다. 16세기 명나라 가정제 시대 도관을 중건했다. 석판 4개를 두고 벽돌을 쌓고 있었다. 갑자기 거지 한 명이 어슬렁거리고 오더니 빗자루로 쓱쓱 청소를 했다. 구걸하는 밥통에 있던 탕을 묻혀 글자를 후다닥 써버렸다. 인부들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물로 씻어내자 ‘봉래선’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제야 여동빈의 현신이라 깨달았다. 못다 쓴 빈칸의 ‘경’은 누가 썼을까? 바로 청나라 건륭제다. 남방 순례 중 이야기를 들은 황제가 밤새 생각 끝에 첨자를 했다. 천자인 황제도 명필이었다. 그래도 속세를 초월한 신선만 하랴. 사람들이 ‘어필이 선필만 못하다(御筆不如仙筆)’고 했다. 필체가 구분되는가? 그냥 인간의 경지나 잘 지킬 일이다.
신선동부(神仙洞府) 문이 나온다. 동부가 신선이 사는 저택이란 뜻이니 ‘역전앞’이다. 중앙미술원 부원장 출신의 뤄궁류가 썼다. 유화를 배운 초기 화가이자 서예가로 유명하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종리전(鍾離殿)이다. 북방 도교 전진도의 시조 왕현보를 승계한 종리권을 봉공한다. 제자가 여동빈이다. 이후 유해섬을 거쳐 왕중양에 이르러 종교로 창시된다. 5명을 묶어 북오조(北五祖)라 부른다. 종리권은 전진도에서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예우한다.
여동빈을 봉공하는 여조전(呂祖殿)이 이어진다. 원나라가 부우제군(孚佑帝君) 봉호를 하사했는데 민간에서도 즐겨 일컫는다. 서민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신선이다. 불교의 관음보살과 체급이 비슷하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도와준다고 확신하는 이름으로 부르겠는가.
여동빈은의 속세의 성은 이(李)다. 어린 시절 수재 소리 듣고 자랐고 과거를 통해 진사에 올랐다. 조정의 패거리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산속 동굴에 은거했다. 동굴에 두 개의 출구가 있었다. 성을 여(呂)로 바꾸고 이름은 동굴을 찾은 손님(洞賓)이라 지었다. 그리고 도를 깨우쳤다. 무협소설의 한 장면 같다. 종리권이 남겼다는 두 개의 보물을 습득한다. 불로장생 단약을 만드는 비법과 악행을 엄벌하는 검법이다. 세상을 구제하는 완벽한 신선이 됐다.
한단지보와 함께 한단지몽(邯鄲之夢)도 있다. 당나라 시대 심기제가 쓴 소설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사 여옹(呂翁)이 나온다. 객잔에서 쉬다가 노생(盧生)과 만나 담소를 나눈다. 옹과 생을 쓴 이유는 늙은이와 젊은이를 위한 소설가의 작법이다. 노생은 여옹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과 전답에 일하러 가는 신세를 한탄한다.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여옹이 내준 베개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다. 종리전, 여조전과 함께 삼대전(三大殿)인 노생사(盧生祠)가 나온다. 잠자는 노생이 보인다.
노생은 명문가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해 재상까지 오른다. 역적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긴다. 벼슬길을 후회하기도 하고 누더기처럼 살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누명을 벗고 재상에 복귀한 뒤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여든을 넘겨 장수한다. 그러다가 잠에서 깬다. 꿈이었다.
여전히 여옹이 곁에 앉았고 객잔 주인은 메조로 만든 밥이 아직 뜸이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메조가 황량이다. 그만큼 짧은 꿈속에서 부귀와 영화, 생사의 기로까지 겪었다. 한단지몽이고 황량몽이다. 사당 벽화는 노생의 꿈으로 도배를 했다.
여선사를 되돌아 나오며 단문(丹門) 앞에 섰다. 대문에 걸린 택패창생(澤沛蒼生)은 중국서예가협회 고문을 역임한 어우양중스가 썼다. 은택이 비처럼 온 천하에 뿌려주는 사람에 대한 예찬이다. 물론 여조를 위한 찬사다. 어쩌면 노생의 일장춘몽이란 생각도 든다.
서예가인 선펑이 쓴 기둥의 대련도 의미심장하다. 봉래선경봉래객(蓬萊仙境蓬萊客)은 ‘봉래선경이 손님을 만나다’는 뜻으로 보인다. 봉(蓬)은 만난다는 의미의 팽(?)과 발음이 같은 ‘peng’이다. 글쓴이 이름도 펑(鵬)이다. 이어서 ‘만세유풍만세시(萬世儒風萬世詩)’다. '유풍'을 유교 풍조로 읽을 필요는 없다. 여조 사당 앞이다. ‘오랜 세월 이어온 여조의 품격이 만세에 이르는 시로 남으리라’는 의미다. 여행객은 그저 읽기만 하노라.
태행산의 혼백이 된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내 중심에 진기로예(晉冀魯豫) 혁명열사능원이 있다. 네 성의 약칭이다. 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 일대는 전쟁터였다. 중간 지점이 한단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후인 1950년 10월 낙성했다. 항일전쟁 중 희생된 영웅들이 묻혔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태행산 항일 근거지를 침탈하자 팔로군 부참모장 쭤취안(左權)이 사망했다. 그만이 아니다. 비목만 남기고 스러져간 무명 열사를 비롯해 200여 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조선인 열사 두 명이 있다. 열사기념당으로 들어간다. 아리랑 곡조와 가사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밀양 출신 윤세주와 평양 출신 진광화 열사가 나란히 나타난다. 짧은 인생을 전투적으로 살았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군에 포위된 팔로군의 위기를 돌파한 조선의용군의 전투가 생생하다. 희생도 눈망울에 밟힌다. 두 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군 타도에 힘을 합치자는 표어도 생생하다. 두 열사의 헌신이 없었다면 덩샤오핑을 비롯한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무사히 살아나기 힘들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 연합해 힘을 합쳤다. 윤세주와 진광화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이르러 민족혼을 불살라 태행산의 혼백이 됐다.
장가계에 간 사람은 혹시 봤을지도 모른다. 천자산에 허룽공원(賀龍公園)이 있다. 표지석을 볼 때마다 오랫동안 바라봤다. 허룽은 장가계에서 차로 100㎞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 1969년 사망했다. 인민해방군 장군의 유해를 절경 옆에 두다니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쭤취안은 태행산 자락 랴오현(遼縣)에서 사망했다. 쭤취안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런 사례는 혁명에 성공한 중국 천지 사방에 깔렸다.
석정(石正) 윤세주 열사 무덤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윤세주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묘비 앞에 서니 그 정도로는 민족혼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는 불만이 폭발한다. 밀양시를 석정시로 바꾸자 하면 극렬 반대할 듯하다.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100년 정도 지나면 가능할까? 한단은 꿈의 도시다. 소박하게나마 석정이 못다 이룬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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