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개인이 문제인가, 시스템이 문제인가.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해묵은 논쟁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똑 부러지게 말하긴 힘들다. 양자택일은 정답이 아니다. 고대 철학부터 현대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는 담론과 학설, 이론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 건 그런 이유다.
이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상원의 ‘여자 체조팀 성폭행 사건’ 청문회도 같은 질문을 남겼다. 이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미국의 체조 여왕’ 시몬 바일스(24)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히, 난 래리 나사르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의 성적 학대가 지속되도록 한 시스템 전체도 비난한다.” 미 체조대표팀 주치의를 지내며 330명 이상의 선수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나사르뿐만 아니라, 그의 악행에 제동을 걸지 못한 미국 사회도 ‘가해자’라는 일갈이었다.
유독 귀에 박힌 한 단어, ‘시스템’. 그 실상은 이렇다. 2012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맥케일라 마로니(26)의 사례를 보자. 2015년 마로니는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 리처드 랜지먼과의 전화통화에서 나사르한테 당한 성학대 피해 경험을 털어놨다. 무려 세 시간 동안.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 해도 고통스러웠을 터.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그게 다야?” 청문회에서 마로니는 “(FBI 요원의) 공감 능력 결핍에 난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치부한 FBI 요원의 실책은 FBI 조직의 ‘사건 뭉개기’로 이어졌다. 마로니의 진술은 기록되지 않고 증발됐다. 당연히 FBI의 수사 개시도, 다른 관계기관으로의 이첩도 없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의 진술 청취가 일부 이뤄지긴 했으나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랜지먼 요원이 마로니 인터뷰를 ‘문서화’한 건 전화통화 후 17개월이나 지나서였다. 그마저도 왜곡투성이였다. FBI 안에서 사건은 방치됐고, 2016년 11월 나사르가 체포될 때까지 추가 피해자만 70명 이상 발생했다. 최소한 그 시간 동안 FBI는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나사르’를 보호해 준 꼴이 됐다.
올해 5월과 8월, 한국의 공군과 해군에서 각각 발생한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도 마찬가지다. 두 여성 부사관의 성추행 피해 호소에도 부대 관계자들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긴커녕, 사건 축소와 은폐에만 급급해했다. 피해자들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졌다. ‘나사르 사건’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초기 대응 담당자의 잘못이 더 큰 피해와 비극을 낳았다는 점은 판박이다. 시스템은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유념할 대목은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한 상대방이 특정 개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바랐던 건 ‘시스템의 작동’이었다. “변명의 여지 없는 잘못”이라면서도 “조직이 아닌 개인의 문제”라고 했던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의 사과는 그래서 틀렸다. 시스템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개인의 잘못은 ‘시스템의 고장’으로 귀결된다. 부적격자를 걸러내고, 적임자를 배치하는 것도 결국 인사나 교육 등 시스템의 몫이다. 불미스러운 사고 때마다 매번 반복된, ‘개인의 실수나 일탈’로 몰아가려는 접근법으로는 어떤 해법도 찾지 못한다는 얘기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