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성전기사단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1307년 10월 13일 성전(템플)기사단 총장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고위직 기사들을 ‘신앙의 적’으로 규정, 대대적 소탕 명령을 내렸다. 입회의식에서 십자가에 침을 뱉고 예수를 부인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동성애를 권장한다는 게 주된 혐의였다. 5년 뒤인 1312년 클레멘트 교황도 빈 공의회를 통해 기사단 해산에 동의했다. 그로써 기독교회 역사 최대의 ‘다국적 용병 벤처기업’이라 할 만한 조직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음모론적 서사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다.
1095년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자 수많은 유럽 신자들이 ‘평화의 마을'(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의미) 성지순례에 나섰다. 하지만 그 여정은 강도가 들끓는 피의 순례길이기도 했다. 순례자 안전을 위한 순찰대가 필요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1120년 성전기사단을 창설하고 그들의 본부인 솔로몬 성전을 건립했다. 기사단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의 기사단’, 공식 표어는 ‘우리가 아닌 주님 당신의 이름에 영광이 있으소서’였다.
기사 9명으로 출범한 가난한 기사단은 1139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공인 칙서를 기점으로,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쏟아진 기부와 세속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면제받는 특권 덕에 급성장했다.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은 전투 기사단과 재정 관리 지원단으로 이원화됐다. 지원단은 순례자나 십자군 참전자들의 재산을 맡고 신용장을 발급하는 은행 업무를 비롯해 여유 자금으로 성당을 건립하고, 토지로 농장과 과수원을 경영하며 부를 불렸다. 당시는 전시였고,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무법의 엘리트 무력집단이자 다국적 사업집단이었고, 유수의 국왕을 채무자로 둔 유럽 최대 금융그룹이었다.
교황을 아비뇽에 유폐시키며 교권에 대한 속권의 우위를 구축한 필리프 4세가 그들의 최대 악성 채무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게, 연이은 십자군 전쟁 패배 못지않게 성전기사단에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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