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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과 문민정부 가교 놓은 노태우 전 대통령

입력
2021.10.27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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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일과 같은 날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일과 같은 날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2·12쿠데타 주역, 민주화 이행엔 역할
국가장·현충원 안장 논란 정리하기를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군사정권 이후 직선제로 선출된 첫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상반된 수식어가 가리키는 바 그대로 고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나, 요약하면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이행하는 가교 역할을 한 대통령이라 하겠다. 북방외교와 대북정책 등 업적을 봐선 ‘전두환 2인자’라는 이미지에 가려 저평가된 면도 있다. 민주화와 북방외교라는 중대한 전환은 물론 시대의 요구였으나, 그때 필요한 역할을 한 것은 고인의 몫이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12·12 군사쿠데타에 동참한 주역이자 후계자라는 점은 고인이 벗을 수 없는 멍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 멤버인 노 전 대통령은 당시 9사단장으로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에 가담했고 이듬해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위원으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고인이 직선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첫 민주정권이 아닌 군사정권의 연장선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고인의 장남인 노재헌 변호사가 수차례 광주를 찾아 사과했지만 고인이 회고록에 유언비어를 탓하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그러나 고인이 직선제를 수용하고 집권 후 탈권위주의를 표방했으며 3당 합당으로 김영삼 대통령 선출의 기회를 제공해 민주사회로 가는 과도기 역할을 충실히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1987년 6·10 민주화항쟁 당시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선언은 유혈 사태를 재연하지 않고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집권 후 “저 노태우, 보통사람”을 주장하며 대통령 풍자를 해도 좋다고 밝히는 등 권위주의를 줄이고 언론 자유를 확장하는 노력도 했다. 다만 ‘5공 청산’은 미완의 것이었다. 퇴임 후 자신도 12·12 사태와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들로부터 헌납받아 4,000억 원대 비자금을 축적한 사실이 드러나 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부패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전 전 대통령과 달리 추징금은 완납했다.

고인의 가장 큰, 그러나 저평가된 성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구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 40여 개국과 수교를 맺어 한국 외교를 한 단계 끌어올린 점이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은 북방외교는 잠재력 있는 시장을 확보하고 북한을 고립시키는 등 다각적이고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북한과 고위급회담을 열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비핵화 선언 등 대북정책에서 성과는 뚜렷하다. 외부 환경이 조성된 적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영욕이 엇갈린 삶만큼 고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를지,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것인지 등 예우에 대한 논란도 일 것으로 보인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되 분열로 치닫는 논쟁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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