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영면하자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6ㆍ29 선언에 의한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서 북방외교 등 여러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12ㆍ12 쿠데타로 군사정권 탄생에 일조한 점과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했던 그의 자세에선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아쉬움의 기저에는 노 전 대통령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자체보다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점이 깔려 있다. 생전에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면 그 무거운 과오조차 다 덮고도 남았을 것이란 아쉬움이다. 사과하고 반성했다면 상대는 분명히 용서하고 화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 사례는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사과의 표본이 될 만한 인물이 드물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가슴 아픈 대목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사과해야 한다고 배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에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그래서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배운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부모나 선배한테도 그렇게 배웠다. 어른이 되면 남들에게도 잘못했으면 사과하라고 가르친다. 자녀한테 그렇게 전하고 친한 후배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유한다.
그런데도 주변에 제대로 사과했다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사과, 마지못해 틀에 박힌 어구를 동원한 박제된 사과, 단서를 달면서 사과하고 사과하는 척하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과까지, 주변엔 ‘사과 아닌 사과’가 넘쳐난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표현이 형식적인 수사로 전락하다 보니, 아예 사과라는 외피마저 벗어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사과해야 할 순간에도 잘못을 합리화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람들 말이다. 여의도에서 매일 벌어지는 풍경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특히 확증편향으로 무장된 요즘 정치인들은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100가지도 더 만들어낼 태세다.
일부 정치인들에겐 사과도 철저한 계산 속에서 나온다. 이 시점에 이 장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과해야지 표를 모으는 데 유리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식이다. ‘진정성’은 애초부터 진지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잘못했다고 말해야 할 때도 자신만은 온갖 이유를 들어 예외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일이 상대에게 발생하면 진정성 있게 사과하라고 몰아붙인다.
이런 사람들 눈에는 진정으로 속죄한 사람들은 오히려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1,100명의 유대인을 살리고도 원죄를 인정하며 더 구하지 못했다고 자책한 오스카 쉰들러. 자신이 살인 혐의로 기소한 피고인이 진범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30년 만에 사과한 마티 스트라우드 검사. 스트라우드 검사는 지역신문 기고를 통해 “나는 오만했고 심판하는 일을 좋아했고 자신만만했다. 정의 자체보다는 이기는 것에 더 몰두했다. 그릇된 판단으로 고통을 안긴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나의 오점이다”라고 말했다.
뻔뻔한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잘못했거나 잘못 판단했을 때 제대로 사과하는 일은 이제 당연한 게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일이 돼버렸다. 한국에서도 사과의 표본이 나와야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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