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사직 이래 전공의 대표를 자임하며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의 행보 변화가 눈에 띄는 요즘이다. 4월 윤석열 대통령 면담 정도를 제외하면 잠행으로 일관하며 정부는 물론 다른 의사단체에 대해서도 철저히 비타협적이던 그가, 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잇따라 접촉해 내년 의대 정원 재조정을 논의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 지금은 참여할 뜻이 없다지만, 박 위원장이 결국 한 대표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여야의정 협의체에 들어가 여야 후원 속에 정부를 압박해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한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형국이다.
박 위원장이 태세를 바꿔 정치권 복판으로 뛰어든 까닭은, 열흘도 안 남은 수능까지 끝나면 내년 의대 증원 백지화 주장이 완전히 공허해질 거라는 절박감의 발로겠지만, 그보다는 대통령 지지율이 20% 선마저 무너질 만큼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각한 지금을 호기로 여겼기 때문이지 싶다. 그의 바람대로 여야가 보다 적극적으로 정부에 '양보'를 요구해준다면, 자신과 반목하는 대한의사협회 지도부가 오는 10일 임현택 회장 탄핵안 가결로 교체된다면, 비록 협의체가 제도권이 깔아놓은 판이더라도 충분히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을 법하다. 박 위원장이 지난달 28일 페이스북에서 내년 의대 증원이 강행된다면 내후년 의대 신입생 선발은 없을 거라고 주장하며 현 고교 2학년생과 학부모의 불안심리를 자극했을 때, 더는 의사 집단행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거리끼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겠다는 자신감을 느낀 건 기자뿐일까.
공교롭게 저 글이 게시된 다음 날,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남은 두 달, 4대 개혁의 추진 상황을 철저히 점검해 핵심 사업들이 연내에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며 공직사회를 독려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지목한 의료개혁을 필두로 연금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의 주요 과제를 단조로운 어조로 일별하는 대통령의 발언에서 '답보' '교착' 같은 단어가 절로 연상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책 수요자의 지지가 높았던 초등 늘봄학교 전면화, 노조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결부시켜 추진력을 얻은 노조 회계공시처럼 순항 중인 사업도 없지 않지만, 핵심 개혁과제 다수는 이해관계자 반발, 여소야대 입법 구도에 가로막혀 전망이 불투명하다.
연금개혁만 해도 두 달 전쯤 대통령이 직접 큰 틀을 발표하며 정부안을 의욕적으로 내놨지만, 국민연금의 소득보장 기능을 중시하는 진영에서 정부안 속 '자동조정장치' 도입안을 '연금 삭감안'이라 비판하자 논의가 금세 지지부진해진 모양새다. 개혁안 요체 대신 '장기 검토 과제'로 두루뭉술 제시됐을 뿐인 아이디어를 집요하게 문제 삼는 속내가 의심스럽지만, 이런 공격에 쉽사리 정책 추진 동력을 뺏기는 정부의 허약함이란. 지난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이 취임 일성으로 대립각을 세운 인공지능(AI) 교과서 도입 정책은 또 어찌될까. 전임 진보 교육감의 귀책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정부 심판'을 표방한 진보 후보가 싱겁게 이긴 것부터가 징후적이다. 개혁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때로는 돌파해야 하는 정치력과 여론전의 영역일진대, 대통령 지지율 반등이 없다면 개혁정책의 행로는 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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