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추수감사절의 진실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격주 토요일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지난 목요일, 즉 11월 25일은 미국 최대의 명절 추수감사절이었다. 나라 안에 시차가 있을 정도로 큰 땅덩어리에 흩어져 사는 미국인들이 최대한 본가에 모인다는 명절인 추수감사절은 올해 평소보다 더 특별했다. 유래를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꼭 40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제 추수감사절이 낯설지 않다. 설이나 추석 같은 가족 명절인지라 핼러윈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틈새를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칠면조의 상징성 때문에 알려져 있기도 하고, 요즘은 몇몇 호텔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도 제공한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외국의 명절을 쇤다는 의미보다, 그김에 궁금한 칠면조 통구이를 한 번 먹어보라는 접근으로 나름의 수요를 누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과 정반대로, 칠면조가 사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상황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칠면조는 작은 게 4~5㎏ 수준으로 무겁고 큰 식재료다 보니 통으로 조리하려면 오븐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븐이 필수 조리기기가 아닐뿐더러, 설사 갖췄더라도 칠면조를 통으로 구울 만큼 크지 않다. 게다가 조리법까지 낯설다 보니 기기와 노하우를 모두 갖춘 호텔 대형 주방의 특별 메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먹든 직접 해먹든, 칠면조는 엄청나게 맛있지 않다. 평균 체지방률이 10% 수준이니 닭보다 좀 더 퍽퍽하고도 밍밍하다. 어찌하여 미국은 칠면조처럼 못 생기고도 퍽퍽하니 맛도 없는 새를 통으로 구워 먹는 명절을 쇠게 된 걸까? 추수감사절이라는 명절은 과연 역사적으로 얼마만큼 정확한 명절인 걸까? 까놓고 보면 복잡한 속내를 최대한 간단히, 문답 형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미국식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잘 알려진 이야기로만 여러 개가 있지만 두루 아울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01년 전인 1620년, 영국의 메이플라워호가 미 대륙의 플리머스에 닻을 내린다. 배에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청교도를 포함한 영국 이민자(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102명(남성 74명, 여성 28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상륙 인구 가운데 절반이 죽을 정도로 엄혹한 겨울을 겪는 가운데, 청교도들은 지역 원주민인 왐파노아그족의 도움을 받는다. 왐파노아그족은 식량을 나눠주고 경작 등 정착 요령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맹을 맺어 적대적인 나라간세트족으로부터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작황이 좋자 이민자들은 왐파노아그족이 동석한 가운데 추수를 감사하는 만찬을 연다.
처음부터 칠면조가 식탁에 올랐나
아니었다. 1621년의 추수감사절 만찬에 대한 문헌은 단 두 건이 남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사슴과 야생 조류, 대구와 농어, 그리고 미대륙 원주민이 경작한 옥수수(죽이나 빵으로), 호두나 밤 등이 식탁에 올랐다고 한다. 야생 조류 가운데 칠면조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오리나 거위, 백조나 나그네비둘기를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구운 칠면조에 크랜베리 소스, 스터핑 혹은 드레싱이라 일컫는 각종 탄수화물을 곁들여 먹는 식단은 첫 번째 추수감사절과 크게 상관이 없다.
칠면조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나
칠면조는 추수감사절이 본격적인 국가 차원의 명절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등장했는데, 첫 추수감사절로부터 거의 200년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추수감사절은 1682년까지는 교회를 통해 축일로 전해 내려 왔고, 이후에도 주별로 쇠는 명절이었다. 그러다가 미국 혁명(1765~1783년)이 끝난 이후인 1789년 11월 26일,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미국 전체를 대상으로 추수감사절을 축하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주마다 각기 다른 날짜를 추수감사절로 삼았으며 '좋았던 옛 시절', 즉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의 향수를 그리는 차원에서 섬기는 명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1827년, 세라 조세파 헤일이라는 여성이 대통령에게 청원을 시작한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여성지 '가디스 레이디스 북(Godey’s Lady’s Book)'이라는 여성지의 편집자였던 그의 청원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명절로 제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무려 36년에 걸쳐 대통령에게 청원을 한 끝에, 우리에게는 노예 해방으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드디어 응한다.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가운데 국민 단합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1863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 전체의 추수감사절로 제정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청원을 하는 사이 헤일은 가디스 레이디스 북에 추수감사절 만찬을 위한 메뉴와 레시피를 계속 선보였다. 그토록 긴 기간에 걸쳐 음식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온 결과, 추수감사절이 국가 공휴일이 되자 그의 레시피가 본격적으로 조리되어 식탁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추수감사절의 역사에 의도적 오류가 있다?
그렇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역사는 철저하게 미국의 건국에만 초점을 맞추어 쓰여진 서사이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건 '최초'에 관한 의도적 오류이다. 미국 원주민은 적어도 1만2,000년 동안 미대륙에서 살아 왔으며 그 긴 세월 동안 유럽인의 진출 및 침탈을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메이플라워호의 승객들에게야 최초였겠지만 필그림 파더스를 도와주었다는 왐파노아그족들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유럽인이 아니었다. 미국 원주민의 시각에서 추수감사절의 역사를 정리한 책 '이 땅은 그들의 땅이다'의 저자인 데이비드 실버먼 교수(조지워싱턴대 사학과)에 의하면 필그림 파더스가 상륙했을 당시 이미 둘 이상의 왐파노아그족 원주민이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영국에 갔다온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추수감사절의 성대한 만찬은 어떻게 시작됐나
영국인들은 오랫동안 추수감사절을 기려 왔는데, 형식은 지금의 미국식과 정반대였다. 신 앞에서 경건하고자 금식하며 기도를 드리는 축일이었다. 그러다가 1769년, 플리머스에 살고 있는 필그림 파더스의 몇몇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기릴 방안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점차 확장되면서 필그림 파더스가 상륙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위세가 사그라드는 걸 막고, 관광 수익을 올리려는 목적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필그림 파더스의 개념 그 자체, 즉 메이플라워호의 승객들이 미국의 선조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목사 알렉산더 영의 '최초의 추수감사절 식사'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링컨에 의해 국가 명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백인 개신교 미국의 체제 강화에 활용되었다. 유럽에서 가톨릭 교도 및 유대인 이민이 대거 유입되자 개신교를 믿는 백인들은 이들로부터 문화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추수감사절 신화를 퍼트렸다. 자신들이 미대륙을 선점하였으며 원주민과의 동맹까지 등에 업고 이 나라에 먼저 뿌리를 내렸다는 일종의 으스대기였다.
한편 19세기 후반에는 추수감사절 신화가 인종 간 화합을 이끄는 데도 쓰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인디언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었으니, 원주민을 슬슬 미국 사회에 편입시켜야 할 시기였다. 이를 위해 원주민까지 함께했다는 첫 번째 만찬의 신화만큼 잘 먹히는 수단이 없었다. 영국에서 건너와 확장을 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침탈을 안 했을 리가 없지만, 첫 번째 만찬이 품고 있는 평화로움이 허물을 덮어 주는 역할을 너끈히 해냈다.
추수감사절, 원주민에게는 '○○의 날'이다?
'명백한 운명'과 '눈물의 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본격적인 원주민 침탈이 이루어졌다. 백인들이 미국 원주민과 유명무실한 조약을 맺어 땅을 일부 빼앗았다. 말 그대로 원주민, 원래 살던 이들의 땅이었지만 거의 아무 대가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도 백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점점 더 많은 땅을 빼앗았다.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 농사도 목축도 어려운 척박한 땅으로 먼 걸음을 걸어 강제 이주당하고 그 과정에서 피로와 굶주림, 추위 등으로 죽어간다. 골드 러시가 일어나자 더 많은 백인들이 서부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민 거주 지역으로 밀고 들어와 압박한다. 그렇게 원주민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북미 전역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명백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논리가 말 그대로 명백한 운명이며,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경로가 바로 눈물의 길이다. 1970년, 왐파노아그족 활동가인 프랭크 제임스의 노력으로 '추모의 날'이 제정되었으니, 미국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 당일에 플리머스에 모여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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