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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대선 TV 토론의 원조격인 미국에서 민주·공화 양당 후보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60년이다. 당시 공화당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 존 F. 케네디의 토론은 TV와 라디오로 동시 중계됐다. 라디오를 들은 사람은 두 후보의 토론 솜씨가 비슷했다고 본 데 비해 TV를 본 이들은 케네디 우위로 느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토론회는 다음 대선에서도 계속되진 않았다.
□ 미국의 대선 토론은 법적 의무가 아니어서 후보 동의가 중요하다. 케네디 암살 후 치러진 1964년 선거에서 민주당 린든 존슨 후보는 지지율이 압도적이어서 토론에 소극적이었다. 그다음 대선에서는 TV 토론 덕을 톡톡히 본 케네디에게 패했던 닉슨이 재출마해 재선 때까지 토론을 거부했다. TV 토론이 지금처럼 정착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치러진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 대결 때부터다. "국민의 알 권리"를 캠페인 구호로 내세웠던 포드와 낮은 인지도를 높이려는 카터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 미국의 대선 TV 토론에 대해서는 비판도 적지 않다. 자격을 사실상 양당 후보로 제한한다거나 토론의 승패가 내용보다 이미지에 좌우되기 쉬운 구조적 문제가 있다. 하지만 유권자의 정치 참여 유도 효과가 어떤 선거 이벤트보다 크다는 이점은 이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대선 토론은 일정한 주제에 대한 후보의 생각을 동시에 비교해 들을 거의 유일한 기회다. 프랑스가 1974년, 내각제인 영국과 일본이 각각 1999년, 2009년부터 이를 따라하는 이유다.
□ 대선 토론을 놓고 후보 간 신경전이 이만저만 아니다. 법정 의무 이외 토론에 소극적인 윤석열 후보는 “싸움밖에 안 난다” “토론을 누가 많이 보냐”며 유권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를 댔다. 토론(debate)은 어원부터 싸움이고 당내 경선과 대선 토론의 주목도나 가치가 같을 수 없다. 최근에는 이재명 후보의 토론 요구를 중범죄가 확정적인 후보의 물타기 정치공세라며 "같잖다"고 했다. 조국을 상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처럼 이 거친 비난에 토론을 피하는 그의 본심이 담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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