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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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짜 정치 덕후라서요."
작년 12월 7일 기자와 함께한 점심 자리에서 돌아가는 대선판을 두고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들려주던 신지예 당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제3지대 돌풍에 거는 기대가 커 보였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서로의 공약을 두고 신랄하게 토론하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가며 궁극적으로 단일화에 도달하는 과정을 유튜브 라이브로 보여주겠다는 아이디어를 설명할 땐 눈이 반짝거렸다.
당분간 제3지대 단일화를 통한 대선 전환에 주력하겠다며 헤어지고 고작 2주 뒤, 그는 국민의힘 새시대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윤석열 후보가 성폭력으로부터 여성 안전만큼은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게 이유였다. 가장 큰 목표는 "정권교체"이고, "권력형 성범죄와 2차 가해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강조했다.
스스로를 "정치 덕후"라고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속내며 신념을 속속들이 알 순 없지만 결과적으로 페미니스트보단 정치인으로 살아남는 길을 택한 걸까, 혼란스럽던 사이 다시 2주가 지났고 이번엔 부위원장 사퇴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한 인물이 갖는 대표성이란 건 복잡한 문제다. 영입 때는 '신지예=페미니즘'이란 상징성이 잔뜩 부풀려지며 난리통이 벌어졌었다. 페미니스트를 들였으니 지지를 철회한다든가, 어찌 반페미니즘 정치에 합류하냐며 반대 성명서를 내든가 하며 말이다.
이 거품이 내쫓기듯 나오는 사퇴로 단 2주 만에 꺼진 셈이다. 신 전 대표가 이기는 정치를 위해 '대선 전환'보다 '정권교체'를, 성차별뿐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사회의 모든 차별에 높은 감수성을 지니는 '페미니즘'보다 '여성 안전'을 취사 선택했듯이, 다른 정치인은 상징성 거품 뒤에서 뭘 택하려 했는지가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윤 후보는 신 부위원장의 사퇴를 사과하며 "2030 마음을 세심히 읽지 못했다", "애초에 없어도 될 논란을 만든 제 잘못", "젠더문제는 세대에 따라 시각이 완전히 다른 분야인데, 기성세대에 치우친 판단으로 청년세대에 큰 실망을 줬다"고 했다. 신 전 대표가 그토록 믿었던 '약속'보다 결국 '이대남(20대 남성) 표'가 더 중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신 전 대표의 새시대준비위 합류 후 'n번방 방지법'에 '검열'이니 '사찰'이니 프레임을 씌우고 성폭력 무고죄를 강화하겠다던 윤 후보의 공약에 변화가 있다면, 그래도 명분은 챙기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정치 덕후"가 그리던 새 시대는 멀어진 듯하다. 사퇴 입장문에서마저 신 전 대표가 후보에게 쓴 "꼭 대통령이 되셔서 n번방 방지법 만들어 주시고, 성폭력 무고죄 법안 공약 철회해 주십시오. 부디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신 그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가 더 공허하게 들린다.
그의 씁쓸한 퇴장이 그래도 남긴 건 있다. 표 때문에 깜짝카드를 들었다 또 버리는 갈팡질팡이 적어도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선 후보들의 정책 대결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다. 앞으로도 공약은 쏟아질 거고 이게 표를 위한 꿀 발린 말인지, 삶에 필요한 정책인지 가늠하는 중요한 시기다. 포퓰리즘 거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냉철한 판단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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