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언론사찰’의 망령을 되살린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사건 얘기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공수처는 또 왜 그랬을까.
복기해보자면, 사건은 간단하다.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이 고검장이 기소됐고, 그 과정에서 공소장 내용이 언론에 유출됐다는 것이다.
처음 대검찰청 감찰부가 나설 땐 대수롭지 않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대검에 ‘진상 조사’를 지시한 것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호시탐탐 찾고 있던 ‘검찰 길들이기’ 구실로는 안성맞춤이었을 테니 말이다.
사실 유출 사례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공소장이나 구속영장 같은 수사 문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건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있어왔던 일이다. 그럴 때마다 수사팀과 검찰 내 누군가는 보도 기자에게 “출처가 어디냐”고 항의했고, 감찰부에서는 검찰 내부를 조사하곤 했다. 내밀한 수사 기밀을 특히나 자주 보도했던 친한 선배 중 한 명은 검찰 고위 간부의 책상 서랍 속 ‘요주의 인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확인 어려운 풍문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번처럼 공소장이 공무상 비밀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별개로 하더라도, ‘비밀’이 외부로 나갔을 때 이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건 조직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수사의 영역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솔직히 현업 기자 중 한 명으로서 ‘이게 수사까지 할 일인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감찰이 내부 징계를 목적으로 유출한 내부자를 찾는 행위라면, 수사는 법적 처벌을 전제로 한다. ‘공소장 유출’과 ‘공소장 내용 보도’가 징계의 수준을 넘어 수사의 대상이 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게다가 수사의 주체가 공수처라니. 고위공직자의 특정 범죄를 수사해야 할 공수처가 나섰다는 점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얼마 전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가 쓴 '공수처 예찬론자의 기이한 침묵’이란 칼럼을 읽었다. 전체 문제 의식에 공감하는 한편, “정치적 중립성과 권한의 오남용 문제를 언급하지 않아 아쉬웠다”는 지난달 필자의 칼럼에 대한 평가가 뼈아팠다. 다만 문제의식을 명쾌하게 드러내지 못한 ‘재주 없음’의 자책과, 그럼에도 “공수처를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됐다.
‘통신사찰’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나도 당했다’는 증언이 속속 등장하면서, 공수처가 통신자료 조회를 했다는 이들은 어느새 300명을 훌쩍 넘겨버렸다. “적법한 수사”라는 공수처 설명이 이젠 억지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길은 잃어도 목적지를 잊어선 안 된다”는 말을 기억한다. 부실한 수사력은 물론, 반복되는 아마추어 같은 일 처리가 당장 개선될 리 만무할 테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공수처를 향한 무용론은 더 거세질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왜 공수처만 사찰이라고 하냐”는 김진욱 처장의 고집, 통신조회 경위에 입을 닫고 있는 공수처의 침묵을 보면, ‘공수처가 목적지를 잊어버린 건 아닌가’하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괴물같이 폭주하던 그곳’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목적지부터 가는 길까지, 찬찬히 따지고 다질 때다.
사족 하나. “정말 제 통신자료는 왜 조회한 겁니까?”
thot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