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같은 탈북민에게 강원 동부전선 철책이 두 번이나 뚫리게 된 굴욕적 사건. 철조망 넘는 장면이 감시카메라에 5번이나 찍히고 경보음이 울렸는데도 눈뜨고 놓친 사건.
이 어이없는 사건의 총책임자는 누굴까. 서욱 국방부 장관이 전방위로 욕을 먹고 있지만 사실 군복을 입고 전군을 지휘하는 이는 원인철 합동참모본부 의장이다. 2020년 9월 국방부 수장이 되면서 전역해 민간인이 된 서 장관은 국방정책을 총괄할 뿐, 전군을 지휘할 실질적 권한이 없다. 실제 국방부에서 일하는 군인들도 정책을 담당해 사복을 입는다. 삼각지나 신용산 일대에 보이는 군복 차림의 군인들은 대부분 작전을 담당하는 합참 소속이다.
그렇다면 왜 서 장관이 대신 총대를 멨을까. 합참 의장의 존재감이 없어서다. 원 의장만 그런 게 아니다. 합참 의장의 미미한 존재감은 숙명이자 미덕이다. 긴급 상황에 대비해 지휘통제실을 지켜야 하기에 콧대 높은 국회 국방위원회도 가급적 그를 여의도로 부르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국회에 출석하더라도 질문 수위를 낮춘다. 군복을 입고 우리 안보를 총책임지는 그 자리를 존중해서다.
‘기레기’ 소리 듣는 기자들마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합참의 무기인 ‘군사기밀’이라는 단어 앞에선 유독 작아진다. 기사 한 줄로 국민 안전이 위협받고 한미 동맹이 와해되고 우리 안보 자산이 노출될 수 있다는데 어쩌겠나.
그런데 요즘 합참을 보면 이를 엄중히 여기기보다는 즐기는 듯하다. 원 의장이 취임한 지 1년 반이 됐지만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른다. 왜 취임하고 전방이 3번이나 뚫렸는지, 청해부대 집단감염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언론과의 접촉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군 입장에서 언론은 피곤한 존재지만 전임자들은 우리 군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지키는지 국민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전하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해왔다.
얼마 전에는 합참 스피커인 신임 공보실장 A육군 대령이 갑자기 사라졌다. 연말에 ‘합참 공보실장’이 박힌 명함을 돌리던 그였다. “1주일간 일해보니 업무가 부담스러웠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그가 근무한 1주일 사이, 탈북민 월책 사건과 올 들어 첫 번째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있었다. 고작 두 사건으로 부담스러웠다니, 진짜 간첩이라도 내려왔으면 군복을 벗으려 했었나보다.
기가 막힌 건 “일이 부담스러워서 못하겠다”고 뛰쳐나간 그의 새 근무지가 격·오지나 한직이 아닌 수도방위사령부라는 점이다. 원 의장과 육군 수뇌부가 내린 결정이다. 그곳에 근무하면 한강이 보이는 서울 용산구 군인아파트 입주 자격이 주어진다. 지방을 떠도는 군인들에게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령 연봉이 1억 원을 넘긴 지도 오래됐다. 근데 언제부터 군 인사가 이렇게 만만해졌나, 아니면 국민이 만만해진 건가.
더 큰 문제는 후배 장교들이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거다. 이미 전군에 소문이 돌았다. 이들 눈에 비친 A대령은 ‘철책 넘은 탈북민과 북한 미사일이 무서워 도망 간 선배’다. 그럼에도 인사 불이익이 없다. 그러니 상당수는 보고 배울 것이다. 동부전선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뚫렸을 리 없다. 이런 기강 해이가 누적된 결과다. 북한에서 진짜 간첩이 내려올까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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