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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3’의 비극

입력
2022.01.2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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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녹화를 재판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헌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4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녹화를 재판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헌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스1

2008년 법조기자 시절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 위헌 여부를 심의했는데 ‘남자 9명’만 모여 결정했다.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었던 전효숙 재판관이 2006년 퇴임하고 2011년 이정미 재판관이 임명되기까지,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그해 한국에서 세계헌법재판소장회의가 열렸는데, 헌재 관계자가 출입기자였던 내게 ‘몰래’ 한탄했다. “각국 재판관들이 왔는데, 죄다 남자뿐인 나라는 우리밖에 없더라고요.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남성이었던 그도, 구성만으로 ‘미개함’을 드러내는 헌재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은 9명 중 3명이 여성이니 세상 좋아졌나. 여기서 또 다른 좌절을 본다. 지난해 말, 헌재가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재판 증거로 사용하도록 규정한 성폭력처벌법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들의 성별을 따져봤다. ‘남자 9명만의 간통죄 심의’를 본 후 생긴 버릇이다.

피고인이 요구하면 5세이든, 6세이든 성범죄 피해 아동을 재판에 참석시키도록 결정한 이들은 유남석·이석태·이은애·이종석·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이었다. 남성 5명, 여성 1명이다. 반대의견은 이선애·이영진·이미선 재판관이 냈다. 여성 2명, 남성 1명이었다.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여성이 6명, 남성이 3명이었다면 이 조항은 합헌결정(위헌 정족수 6명)이 났으리라 판단된다.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것이다. 판사가 성별로 판결하나? 한번 훑어보길 바란다. 논란이 돼온 성범죄 판결 기사들을. 으레 당연하고, 익숙하게 남성 판사의 이름이 보인다. 최근엔 대낮에 쇼핑몰에서 청소년을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한 20대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물론 많은 남성 판사들은 선량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접근하리라 믿는다. 약자로 살아온 경험 없이도 그 마음을 세심히 알아차리는 뛰어난 이들도 분명 많다. 하지만 헌재 결정처럼 성범죄 관련 사안에서 남성들이 결정을 주도할 때, 그 위험도 명확한 것 같다.

사실 사회의 주요 정책들은 여성들에 의해 결정된 적이 거의 없다. “여자들은 왜 군대 안 가냐”고 여성들에게 따지지만, 여성 병사를 포용하지 않는 제도와 군 문화를 만들어 온 것도 남성들이었다.

‘여성 지성의 배제’는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를 위험하게 한다. 헌재처럼 직관적 가치판단이 많이 작용하고, 법을 없앨 수 있는 곳은 더 그렇다. 입법부·행정부와 달리 논의 과정을 알 수 없으며, 이번 사안은 공개변론·의견조회조차 없었다고 한다. 법 개정을 준비할 시간(헌법 불합치 결정)도 주지 않았다.

헌재 결정으로 6세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 호출됐단 소식이 들린다. 피해자의 변호인 오선희 변호사는 MBC 라디오 ‘표창원의 뉴스하이킥’에 출연해 “고통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나가서 증언할 것인가, 가해자가 무죄 받는 것을 볼 건가 선택은 둘 중 하나”라며 “아동은 장기간 심리치료를 받아 왔다. 보호자는 무죄를 받더라도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참담한 귀결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여성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 대법관의 수는 9명 전원”이라며, “남자뿐일 땐 아무도 뭐라고 안 했잖아요”라 했다던가. 그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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