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책방에서 저는 에세이 창작 수업을 합니다. 어느 날, 한 중년의 사내가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고. 밥벌이를 잠시 멈춘 그는 언젠가 본 영화 '시'에서 할머니가 쓴 것 같은 아름다운 시를 한번 써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더듬거리며, 때때로 멈추며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와 함께 더듬거리고 말을 멈췄습니다. 남들보다 이르고 늦음의 차이야 있지만, 그 열망의 순간은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열망을 찾아 떠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나 밥벌이와 무관한 글을, 시를 쓰겠다는 사람인데 그 앞에서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매주 저녁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골책방으로 왔습니다. 글을 써본 적이 없다는데, 글이 참 좋았습니다. 단정하고 절제된 글에서 그의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편지'란 글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갈 때 저는 그만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자 오히려 그가 당황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저는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며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무능해서 싫어했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딸의 이야기에서도, 갯벌에서 당신의 삶을 파내듯 조개를 캐는 어머니를 그린 이야기에서도, 수의를 차려입은 아버지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이야기에서도, 그 외 수많은 글을 읽다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글귀를 만나면 저는 곧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글감을 찾다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감성에 매몰됐었다고. 그러나 편린을 그러모아 한 편의 글로 완성하면서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쓰려고 지우고 또 지웠다고. 그러니 그 글이 독자를 울릴 수밖에요. 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담는집만 들어오면 나는 소년이 되어버린다.'
저는 그 문구 앞에서 얼굴이 발개졌습니다. 한 중년 사내가 책방에서 소년이 됩니다. 그동안 세상의 거센 바람 덕분에 거칠 대로 거칠어져 나무껍질 같았던 마음이 맨살을 드러냅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년의 가슴은 일렁댑니다. 그 보드라운 가슴으로 들어앉는 것들은 이제껏과는 다른 것들일 테고, 그 물결이 어떤 무늬를 그려낼지는 그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에세이 창작 수업을 하는 이들이 모두 소년소녀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독서 모임을 하는 이들도, 책방에 와서 책 한 권을 사 가는 할아버지도, 혼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한없이 창밖 나무를 보던 할머니도 모두 소년소녀였습니다. 엄마, 아빠, 선생, 의사, 사장,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세상에서 나를 밝히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나. 그냥 나인 순간. 들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를 만들어가는, 아직 뭐가 될지 모르는 저 소년소녀들. 아, 저도 소녀가 될 밖에요.
이제 소녀는 세상 변두리에서 몸을 비벼대는 대신, 겨울 땅에서 움트는 새순을 찾느라고 눈을 비벼댑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몸을 배배 꼬는 대신, 이젠 읽고 싶은 책들이 펼쳐진 책방에서 몸을 꼽니다. 오늘은 어떤 구름이 다녀가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소년소녀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소녀가, 용기를 내 시골책방을 무작정 차린 저 소녀가 지금은 참 사랑스럽습니다. 이제야 저는 나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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