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정래야. 지금 나와라. 우리 학교 동창들 다 모였는데, 다들 너 보고 싶대.”
“친구야, 미안한데 오늘은 정말 안 된다. 내가 요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오늘 김범우가 나오는 정말 중요한 장면을 쓰고 있어서.”
언젠가 TV에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유독 이 대화 내용이 잊히지 않는다. 조정래 선생의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뭐라고 했을까. “그래, 정래는 중요한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다음에 보자고 하고 우리끼리 놀자. 우리가 이해해야지” 이랬을까? 그럴 리가 없다. 야, 그놈 소설 쓴다고 잘난 척 무지 하네, 너만 일하냐? 하루쯤 쉬고 내일 쓰면 되지. 참 티를 내요, 티를… 안 봐도 너무 뻔하다.
얄밉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걸 누가 좋아하랴. 하지만 그 순간 조정래 선생에겐 다른 무엇보다도 쓰고 있던 소설이 중요했다. 만약 그때 그가 동창회에 나갔다면,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서 집필을 미뤘다면 '태백산맥'이라는 대하소설을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이어지는 '아리랑', '한강' 같은 작품을 책꽂이에 꽂을 수 있었을까.
글쓰기 수업 시간에 가끔 이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정재승 박사의 얘기도 곁들인다. “정재승 박사님은 마치 하루가 48시간쯤 되는 것처럼 동시에 많은 일을 하시는데 그 비결이 뭐예요?”라고 묻는 질문에 그는 “회식엔 무조건 참석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어요"라는 답을 던졌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과의 교류나 음주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이 또한 얄미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사람들과 늘 어울린다면 정재승 박사가 그 많은 책을 읽고 쓰고 물리학자이자 뇌과학 전문가로서의 수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인생은 결과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현대미술 기획전으로 열린 엘름그린&드라그셋의 ‘Spaces’를 보면서 더 굳어졌다. 마이클 엘름그린(Michael Elmgreen)과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은 1995년부터 활동한 듀오 아티스트인데 그 상상력과 실천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사막 한복판에 프라다 매장을 세운 영구 설치 작업 ‘프라다 마파(Prada Marfa, 2005)’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작품 세계는 규모부터 남다른데 이번 전시에서도 실제 크기와 별 차이가 없는 풀장이 들어섰고 스테인리스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주방과 실험실, 레스토랑 등을 돌아보자면 이 많은 설치비와 인력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막에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매장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전에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아이디어들을 제시했고 예술성은 물론 시대적·사회적 의미까지 갖는 작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건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나중에 만들어진 말이지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력서를 쓰는 것도 자신이 그동안 만들어온 결과물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뭔가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그걸 이루기 위해 남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늘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궁리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과정보다 결과’라는 말이 각박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어쩌랴. 세상은 성격이 급해서 뭐든 결과부터 확인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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