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을 빨았다. 양쪽 방의 담요와 차렵이불, 베갯잇과 소파용 무릎 담요까지 넣으니 대용량 세탁기가 가득 찼다. 실은 지난주에 빨아야 했다. 한데 사고가 끼어드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혼자서 넘어졌다. 기억하는 한 이렇듯 세게 넘어진 건 처음이었다. 저물녘 산책길에서 무언가에 살짝 걸렸는데 물에 젖은 나무통처럼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벼락같이 일어난 일인 데다 아스콘 바닥과 부딪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채신머리없게도 한참을 엎어진 채 그대로 있어야 했다. 친구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길가에 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저쪽 나무 아래로 날아가 있었다. '살아보겠다고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내던진 뒤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나 보군.' 속으로 생각하며 피식 웃는데 왼쪽 얼굴이 쓰리고 뻐근했다. 양쪽 무릎과 팔꿈치가 새빨갛게 쓸리고 손등과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이마랑 얼굴에도 꽤 큰 상처가 생겼어. 응급실에 가자."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집으로 왔다. 응급실에 다녀오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텐데, 이 정도 상처에는 잠이 보약일 성싶었다.
하루 이틀에 나을 일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얼굴과 손의 부기가 줄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내 직원이 반색하며 맞았다. 마침 환자가 한 명도 없었던 거다. 의사가 곳곳의 상처를 찾아 소독하고 약 바르기 무섭게 옆에서 대기하던 간호사가 야무진 손길로 밴드 붙이고 싸매는 일을 처리했다.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해요. 그리고 항생제는 약으로도 처방하겠지만 주사를 맞아두는 편이 좋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오른쪽 엉덩이에 파상풍 주사를 놓고 나자 간호사가 왼쪽 엉덩이에 항생제 주사를 꽂았다. 흥미로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이불빨래를 걱정했다. '다음 주 주말에 손님들이 오기로 했는데. 깨끗한 이부자리로 손님맞이를 해야 할 텐데.'
남부끄러운 건 괜찮은데 걱정하게 만드는 건 영 싫다. 행여 나이 든 부모가 알까, 아침저녁으로 유쾌하게 전화를 했건만 나흘째 되는 날 엄마가 영상전화를 걸어왔다. "막내한테 얘기 들었다, 넘어져서 얼굴이 깨졌다고. 얼마나 다친 거니?" 다행히 병원 치료 후 얼굴 부기와 멍은 썰물처럼 빠진 상태였다. 살짝 긁혔다고, 흉터 없애는 밴드까지 붙여놨으니 못생긴 얼굴 더 흉해지는 불상사는 없을 거라 큰소리치는 딸을 살피며 엄마가 울먹였다. "뼈는? 뼈는 안 다친 거야?" 아, 뼈가 멀쩡하구나. 며칠간 내 마음을 짓눌러온 먹장구름이 그 순간 사라졌다. 행복 호르몬 덕인지 깊게 팼던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어 일주일 만에 가벼운 집안일도 가능해졌다.
건조기에 넣고 돌린 이불을 베란다로 가져갔다. 전후좌우 죄다 이상하기만 한 세상사를 쫓아내듯 이불들을 힘껏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가을바람과 햇살은 자연이 빚은 명작이다. 한나절 후 걷어 들인 이불에서 기분 좋은 바질 향(손님들 취향에 맞춰 신중하게 고른 섬유유연제였다)이 났다. 맞다. 사람이든 세상사든 뼈대만 성하면 찢기고 팬 상처는 생각보다 빨리 아물고 새살이 돋는다. 한데 뼈가 부러지고 형체마저 이지러진 상황이라면, 그땐 어쩌지? 뼈대를 새로 갈고 틀을 바꾼다(換骨奪胎)는 말이 떠오르며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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