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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옛것이 새롭지 않을 때

입력
2024.11.14 22: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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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말라카 존커 스트리트에 위치한 오래된 상가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말레이시아 말라카 존커 스트리트에 위치한 오래된 상가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여기는 죽어가는 도시야, 너무 지루하다고!”

앱으로 호출만 하면 몇 분 안에 도착하는 공유 차량 운전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 빌보드 글로벌 차트 3주 연속 정상에 오른 '아파트'를 신나게 틀고 달려온 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틀 정도 머물 건데 추천할 만한 현지 식당이 있냐고 물었더니 "굳이?"라고 답했다.

반짝이는 불빛이 운하의 물결을 따라 출렁이던 나의 아름다운 도시 말라카(말레이시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가 그렇게 지루해 마지않던 말라카는 100년 넘은 건물쯤은 흔하디흔한 역사 도시다. 15세기부터 터를 닦은 중국인 이민자들 덕에 아래층은 가게로 위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중국식 숍하우스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고, 예로부터 골동품 수집상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진품을 발견하기 좋은 보물창고로 알려졌다.

거금을 모은 무역상들이 서로 화려한 저택을 짓기 위해 경쟁했던 히렌 거리(Heeren Street)는 ‘백만장자의 골목‘이라 불렸다. 특히 이민자 후손 5대째에 백만장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말레이시아 최초의 고무공장을 설립한 탄차이얀을 비롯한 걸출한 리더들이 이곳 출신이다. 우리로 치면 삼성이나 LG의 창업자들이 탄생한 거리인 셈이다.

바로 옆 존커 거리(Jonker Street)에는 히렌 거리 부잣집을 위해 일하던 이들이 거주했다. 지금도 수백 년 된 역사 건물을 이용하는 가게들이 영업 중인데, 그 오래된 골목 귀퉁이에는 어김없이 ‘코피티암’(Kopi-tiam)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가게에서 여러 음식가판이 돌아가며 장사하는 말레이만의 독특한 커피숍 문화. 코피티암 주인들은 손님들에게 테이블을 제공하면서 자리값으로 커피나 음료를 파니, 단골 많은 노점을 얼마나 유치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간판 없이도 입소문만으로 유명해져 대를 잇는 가게가 부지기수. 하지만 코로나 이후 달라진 세상을 피해 갈 순 없었다. 하루하루 손님을 받아야 이어갈 수 있는 영세 가게들은 버틸 여력이 없었고,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이 운영하는 노점들은 배달서비스 업체 등록조차 힘에 겨웠다.

이른 아침부터 딤섬 몇 접시와 차 한 주전자로 요기하며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단골이 유난히 많던 딤섬 집에는 아마도 딱 한 번 방문했을 여행자의 악플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덩어리 식빵을 서걱서걱 잘라내 포슬포슬하게 구워 주던 카야토스트 집에는 젊은이들 발길이 뚝 끊겼고, 대신 ‘노포 콘셉트’로 새로 인테리어한 가게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할머니가 끓여주는 국물이 헛헛한 속을 채워 주던 쌀죽 가게도 닫혔다. 달큼하게 조린 고기반찬을 툭툭 썰어서 올려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지도, 대를 잇기보다는 건물이라도 파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찰나였지만 말라카의 ‘낡고 오래된 것’들은 SNS의 반짝이는 유행으로 소비됐다. 집 하나 가게 하나마다 얽힌 사연만 들어도 며칠이 훌쩍 가 버릴 도시지만, 그럴듯한 사진으로 담기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다들 흥미를 잃었다. 이렇게 오래된 것들이 여행의 ‘구경거리’가 될 때마다 “부자들은 가난마저 훔쳐 삶을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는다”는 소설 구절이 떠올랐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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