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산유국들이 지정학적 이유로 석유공급량을 급격히 줄이면서 유가가 급등하고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일으킨 역사적 ‘오일쇼크’로는 1970년대 발생한 두 차례의 사례가 각각 1차, 2차로 꼽힌다. 2008년에도 1월에 배럴당 99.64달러 수준이던 게 7월 145.49달러까지 치솟아 쇼크라고 할 정도의 유가 급등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때는 지정학적 요인보다는 중국 수요 폭발에 따른 원유 확보 경쟁과 투기 등 시장요인이 크게 작용해 비교적 단기에 종료됐다는 점이 다르다.
▦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이 계기가 됐다.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원유 고시가격을 17% 올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매월 원유 생산을 전월 대비 5%씩 감축하기로 하면서 본격화했다. 석유자원의 무기화가 감행된 것이다. 그 결과 국제유가가 이전에 비해 4배가량 치솟았고, 세계경제는 2차 세계대전 이래 계속됐던 장기호황을 마감하게 된다.
▦ 2차 오일쇼크는 1979년 친미정권인 팔레비왕조가 전복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공화국이 성립한 이란혁명으로 촉발됐다. 당시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이끌게 된 이란이 미국과 단교하고 원유 수출을 전면 중단하면서 글로벌 공급쇼크 우려가 증폭됐다. 1978년 초 배럴당 13.66달러이던 국제유가는 81년 10월 38.28달러까지 치솟았다. 당시 두 차례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도 막대한 타격을 입은 건 물론이다.
▦ 1차 오일쇼크 직전인 1973년 14.9%를 기록했던 성장률은 74, 75년 각각 9.5%, 7.8%로 급락한다. 국가적 석유소비절약운동이 전개됐고, 사실상 석유배급제가 실시됐다. 물가까지 앙등해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2차 오일쇼크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우크라이나 침략 응징조치로 미국이 러시아 석유금수를 선언하고, 러시아가 원자재 수출중단으로 맞서면서 3차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대선은 끝났지만, 우리 경제에 몰아치는 도전의 파고는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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